무시무종(無始無終)의 우주관과 풍수의 지혜
백승기 · 2026-05-22 · 도시 풍수
시간 있는가?
시간은 인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적 주제다. 대부분의 서구 문명은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선형적 구조를 전제했다. 이를 시종론(始終論)이라 한다. 기독교의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이슬람의 카이로스(kairos)은 모두‘창조와 종말’이라는 직선적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동양, 특히 한국 고대 사유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우리 조상들은 시간을 무시무종(無始無終), 즉 시작도 끝도 없는 흐름으로 인식했다. 시간은 어느 순간 창조되지 않았고, 어떤 순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발원과 종착을 알 수 없는 강물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과 같다. 풍수지리학은 이 철학을 바탕으로 공간을 해석한다. 공간은 고정된 그릇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호흡하는 살아 있는 존재다. 고대 한국 우주론에서 무시무종 관은 가장 짧으면서도 깊은 철학 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속에 응축되어 있다. 총 81자에 불과하지만, 그 첫 구절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은 곧 ‘하나는 시작이 없으며, 하나로부터 시작이 없이 시작된다.’라는 뜻이다. 이는 우주가 특정 시점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선언이다.
신시(神市) 시대의 사유는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공간과 인간, 신성을 연결했다. 풍수지리의 음택과 양택 역시 과거에서 흘러온 기운과 미래로 향하는 생기의 흐름이 교차하는 자리로 이해되었다. 왕릉이 후손의 번영을 결정한다는 믿음 또한 무시무종 적 시간관의 적용인 것이다. 오행론 역시 마찬가지다. 목·화·토·금·수의 다섯 기운은 끊임없이 생하고 극하며 순환한다. 이는 직선적 선형 구조가 아니라 무한 순환 구조이며, 곧 무시무종 철학의 물리적 상징이다. 우리의 전통놀이인 윷놀이는 시작점과 끝점이 같은 무시무종을 대표하는 놀이이며 천부경의 완성본이다. 말로 쓰이는 ‘도. 개. 걸. 윷. 모’는 28수로 구성된 천계에서 유희하는 신선의 놀이 기구를 상징한듯하다.
우리말에 시간 철학이 깊이 배어 있다. ‘오늘’은 지나가는 하루가 아니라 ‘늘 있는 지금’이라는 오는 늘의 의미를 품는다. ‘모레’는 ‘내일 이후’가 아니라, 미래가 다가옴을 강조하는 미래지향적 언어다. 영어의 yesterday-today-tomorrow가 직선적 구조라면, 한글의 시간 인식은 오늘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가 환처럼 감싸는 구조다. 풍수도 같은 맥락이다. 한옥의 구조를 보면, 남향 배치만이 아니라 시간의 리듬이 반영된다. 아침 햇살은 동쪽 안방으로 들어오고, 저녁 기운은 서쪽 마당에 머문다. 계절에 따라 대문을 열거나 닫는 것도 단순한 생활습관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풍수적 실천이다. 불교에서는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인 찰나에도 수 없는 시간이 흐른다고 본다. 1년은 계절의 순환 속에서 생명체의 시작과 성장·번영·수확과 휴식을 아우르는 거대한 주기다. 풍수는 이 모든 시간 단위를 공간에 반영하는 학문이다.
전통적으로 풍수는 절대 방위를 중시해 왔다. 남향 배치,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 같은 개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기후 변화, 도시 환경, 생활 방식의 다변화로 인해 절대적 기준만으로는 삶의 질을 설명하기 어렵다. 풍수는 북반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남반구에서는 북향 배치를 해야 한다. 즉 해를 향해 모든 지구의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해바라기 풍수라 부른다. 또한 남반구와 북반구는 적도를 기준으로 물이 돌아가는 방향이 바뀌는데 회전 선형이 S자형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절대 풍수와 달리 상대 풍수는 고정된 방위의 길흉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패턴과 공동체의 필요사항 그리고 시대적 맥락을 고려한 유연한 통풍유수(通風流水)를 말한다.
오늘을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어제의 흔적 속에서 내일의 가능성을 키워내기 위함이다. 무시무종의 정신적 사유는 바로 그 연속성을 깨닫게 해주며, 풍수는 이를 구체적인 삶의 공간 속에서 구현하는 도구이며 지혜다. ‘시간은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져 오늘을 살게 하는 역사의 힘이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과거의 축적이며, 동시에 미래의 씨앗이다. 무시무종은 우리에게 현재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이 곧 미래를 설계하는 이성적인 일임을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