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검은색을 어둠이라 하는가, BTS가 증명한 지혜의 갈무리
박지민 · 2026-03-25 · 왕의 길
지난 3월 21일, 대한민국 정치와 역사의 상징적 공간인 광화문 광장은 방탄소년단(BTS)의 복귀 무대로 뜨겁게 달궈졌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펼쳐진 이 장엄한 퍼포먼스를 두고, 이튿날 언론과 평단은 묘하게 엇갈린 반응을 내놓았다.
화려한 원색과 찬란한 조명, 축제의 흥겨움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그날 BTS가 선보인 ‘검은색’ 의상과 무대 장치는 당혹감으로 다가온 듯했다. 일부 매체는 “축제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움”이라거나 “지나치게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라며 비판 섞인 평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현상의 표피에 머무는 시선은 본질의 심연을 결코 읽어낼 수 없는 법이다. 그날 광화문을 가득 채운 검은색은 디자이너가 통상 선택하는 미적 선택이 아니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거듭난 예술가들이 세상에 던진 '성숙의 선언'이자, 동양의 고전적 지혜와 현대적 서사가 결합한 '형이상학적 퍼포먼스'였다. 우리는 이제 그 비판의 너머, 검은 그림자가 품고 있는 거대한 미학적 실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2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발매를 기념해 무료 공연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BTS THE COMEBACK LIVE|ARIRANG)을 열고 있다. [빅히트 뮤직/넷플릭스 제공]
화려함의 끝에서 만나는 인간의 본질
인간은 누구나 빛나기를 갈망한다. 온갖 화려한 색깔의 옷으로 몸을 꾸미고, 타인의 시선이라는 조명 아래 자신을 세우려 애쓴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정직한 진실은 발밑에 숨어 있다.
세상의 어떤 화려한 색깔로 겉면을 칠해도 그 몸이 만드는 그림자는 결국 다 까맣다.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다이아몬드든, 길가에 굴러다니는 이름 없는 돌멩이든 빛 앞에 서면 오직 검은 그림자만을 남길 뿐이다. 온갖 인위적인 빛으로 사방을 비추어대도, 그 빛이 미처 닿지 못하는 주체의 이면은 예외 없이 깊고 검은 그림자의 영역으로 남는다.
이것은 '절대적 평등'의 미학이다. 잘났든 못났든, 권력의 정점에 서 있든 낮은 곳에서 묵묵히 삶의 무게를 견디든, 한바탕 뜨겁게 살다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그림자는 차별이 없다. 크든 작든, 높든 낮든 그림자는 모두가 똑같은 검은색이다.
BTS가 광화문 무대에서 선택한 검은색은 바로 이 겸허한 평등으로의 회귀였다. 군림하는 ‘왕’의 금빛 왕관을 내려놓고,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그림자의 색을 입음으로써 그들은 스타라는 환상의 구름 위가 아닌, 국민의 발밑에서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만물의 형체를 완성하는 그림자의 미덕,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청년이 갖춰야 할 진정한 왕도(王道)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2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발매를 기념해 무료 공연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BTS THE COMEBACK LIVE|ARIRANG)을 열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지구가 제 그림자를 걷어내는 부활의 방식
우리는 흔히 아침이 오면 태양이 떠올라 어둠을 몰아낸다고 믿는다. 빛이 외부로부터 찾아와 수동적인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법칙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구의 절반은 항상 자신의 거대한 몸체에 가려진 그림자에 덮여 까만 밤을 지낸다. 그리고 찬란한 아침은 외부의 태양이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가 스스로 몸을 돌려 '제 그림자를 스스로 걷어낼 때' 비로소 시작된다.
BTS에게 지난 군 복무와 공백기는 길고도 혹독한 겨울이자, 스스로의 그림자 속에 잠겨 내실을 다지는 밤의 시간이었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그들은 타인의 평가나 화려한 박수 소리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를 닦는 수신(修身)의 과정을 거쳤다.
그날 광화문의 검은 무대는 외부의 빛을 구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혜를 연마한 청년들이 스스로 자전(自轉)하여 제 그림자를 걷어내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빛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장엄한 '주체적 부활'의 의식이었다. 비판론자들이 말하는 ‘침울함’은 사실 새로운 생명이 싹트기 직전, 만물의 에너지가 가장 농밀하게 응축된 태동의 고요함이었던 셈이다.
포용과 갈무리의 북방색(北方色)
동양의 전통 오행(五行) 철학에서 검은색(黑)은 북방을 의미하며, 계절로는 ‘겨울’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겨울을 죽음과 정지의 계절이라 오해하지만, 철학적 의미에서의 겨울은 만물이 생명을 갈무리하고 다음 세대를 잉태하는 '지혜의 시간'이다. 씨앗이 땅 밑 어두운 곳에서 겨울을 나야 봄에 싹을 틔울 수 있듯, 검은색은 모든 가능성을 품은 모태(母胎)의 색이다.
BTS는 광화문에서 검은 옷을 입고 우리 민족의 영혼이 담긴 ‘아리랑’을 불렀다. 이것은 민족의 오랜 한(恨)과 흥(興)을 검은색이라는 깊고 넓은 그릇에 담아낸 미학적 승화였다. 검은색은 세상의 모든 색을 흡수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과 기쁨,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두 포용하여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드는 포용의 정치가 바로 이 검은 미학 속에 깃들어 있다.
스스로 어둠이 되어 타인을 빛나게 하고, 모든 색을 품어 가장 깊은 무채색으로 남는 것. 그것이 바로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갈무리의 지혜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2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발매를 기념해 무료 공연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BTS THE COMEBACK LIVE|ARIRANG)을 열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왕도는 정도(正道)이며, 정도는 그림자에서 시작된다
광화문의 검은 무대를 향한 성급한 비판은 결국 본질을 보지 못한 소치였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깊이였고, 절망이 아니라 부활을 예비한 지혜였다. BTS는 그날 스스로 검은 그림자가 되어 우리 곁에 다시 섰다. 화려한 행차 대신 낮은 곳을 택하고, 권위의 옷 대신 평등의 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시대가 갈구하는 정도(正道)의 실체를 본다.
방탄소년단이 ‘방탄청년단’으로 거듭나며 보여준 이 검은색의 미학은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엄중한 시사점을 던진다. 화려한 수사구와 권위라는 옷으로 국민 위를 행차하려는 자들은 결코 국민의 진심을 얻을 수 없다.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국민의 삶을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자, 긴 겨울의 침묵 속에서 지혜를 닦고 스스로의 어둠을 걷어낼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이 시대의 지도자다.
검은색은 색의 종착지이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 지혜의 색을 입은 청년들이 이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진정한 빛이 되어 돌아왔다. 왕의 길을 걸어보자. “누가 왕인가” 당신이 왕이다.(You are the king)
왕도는 곧 정도(正道)다. 그리고 그 정도는 자신을 그림자로 낮추는 겸손과, 제 몸을 돌려 스스로 어둠을 걷어내는 자각의 지혜에서 완성된다. 광화문의 검은 그림자는 이제 우리 가슴 속에서 부활의 찬란한 빛으로 다시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