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숨결 위에 삶의 항로를 그리다

백승기 · 2026-05-07 · 향토 문화

땅의 숨결 위에 삶의 항로를 그리다

대지에 발을 딛고 선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흙 위에서 머무는 행위만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수만 년간 땅에서 시간의 기억과 마주하는 일을 하였으며, 대지의 기운 위에 삶과 죽음의 궤적을 설계하는 숭고한 작업을 하였다.건축가이자 도시를 그리는 공학자로서, 나는 늘 공간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질서를 살핀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집인 ‘양택(陽宅)’과 떠난 분들이 잠든 ‘음택(陰宅)’은 결국 우리 삶이라는 하나의 긴 항로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상생의 공간학 우리가 매일 숨 쉬고 일하는 모든 공간을 통칭해 양택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안식처인 집과 일터인 사무실,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학교 등이 모두 포함된다. 양택은 살아있는 사람의 건강과 번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집을 설계한다는 것은 그 집에 살 사람의 삶이 자연의 리듬과 박자를 맞추도록 공간적 조율을 하는 일이다. 반면 음택은 세상을 떠난 분들의 육신을 모시는 무덤 공간이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죽음을 끝이 아니라 본래 왔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조상이 편안한 자리에 잠들어야 후손도 번성한다는 믿음은 뿌리가 튼튼해야 가지가 무성하다는 생명의 이치다. 음택은 정적인 안식의 에너지를 상징하며, 고인을 자연의 품에 가장 편안하게 모시려는 지극한 예우의 공간이다.

무위자연과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지혜 내가 전수받고 있는 ‘상대풍수학’은 단순히 고정된 절대방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핵심은 대자연의 조화와 사람의 역할이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선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천지인(天地人) 합일’이 그 뿌리다. 이를 비유하자면, 대지는 넘실거리는 바다와 같고 인간은 그 위를 항해하는 마도로스 선장과 같다. 유능한 선장은 파도를 억지로 거스르지 않고 바람의 방향을 읽어 순풍에 돛을 단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참뜻이다. 무위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는 순리 그 자체다.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곧 최고의 도(道)다. 지난 3월 출간한 저서 『왕의 길』의 핵심 이념은 왕도다. 도덕경의 ‘도’ 역시 이 지점을 향하고 있다. 『왕의 길』에서 강조하는 왕도는 곧 바름, 즉 ‘정도(正道)’다. 우리가 대지 위에서 바른 터를 찾고 조화로운 건축을 지향하는 이유는 결국 삶의 바른길을 찾기 위함이다. 자연의 섭리는 비단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파벌 싸움에 매몰된 위정자들 역시 자연에서 흐름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위적으로 물길을 막고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는 반드시 큰 탈이 나기 마련이다. 지도자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바탕으로 민심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순응하며, 역풍에 돛 달지 말고 순풍에 돛을 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왕도란 자연 속에서 정도를 찾고, 바른길을 가는 모범을 보일 때 비로소 국가라는 배가 평안한 항해를 이어갈 수 있다. 정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가장 바르고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찾아가는 고도의 설계 전략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반도는 예부터 수려한 금수강산을 품은 기운찬 땅이다. 이 귀한 대지 위에 세워지는 건축물들은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서 숨 쉬고, 떠난 이의 기억이 살아있는 사람의 삶을 지탱해 주는 따뜻한 상생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전통의 지혜를 현대적인 건축 언어로 풀어낼 때, 우리는 자연과 인간이 다투지 않고 더불어 상생하는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땅은 정직하다. 정성을 다해 다독인 땅은 반드시 그곳에 머무는 이들에게 평온과 번영으로 보답한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양택과 음택이 공존하는 대지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백승기<한켠 슈퍼바이저 건축사/도시공학박사> 출처 : 전북도민일보( http://www.domi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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