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객사와 풍패지관(豊沛之館)

김현종 · 2026-05-28 · 칼럼

전주객사와 풍패지관(豊沛之館)

올해로 10번째를 맞는 전주 국제영화제는 명실 공히 국제영화제로서 손색이 없는 듯 중앙동과 고사동의 비좁은 문화 거리마다 해외와 전국 각지에서 온 영화예술인 들과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전주는 조선 왕조의 발원지답게 경기전, 풍남문, 한옥마을 등 여러 곳에서 전통 문화가 유려하게 숨 쉬고 있으며, 잘 숙성된 향토 음식의 정취는 토속적인 막걸리와 정갈스럽게 어울려 한바탕 신나는 춤사위를 벌이는 듯하였다. 5월의 따뜻한 햇살을 등지며 남부시장의 풍남문을 돌아 전동성당에 이르러 그 자태의 아름다움과 고귀한 성스러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묵상을 하게 된다. 나그네의 발길은 어느덧 중앙동 객사에 도착하여 객사를 마주보고 서있다. 오랜 세월 외세의 세파(世波)에도 굴하지 않고 숭고하게 지켜온 위풍당당한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네모반듯한 회색 벽 콘크리트건물과 현란하게 나부끼는 광고물 그리고 수많은 외래어 간판들 사이에서 한 많은 영혼들이 낯선 시간 속으로 잠겨 들어가며 도심 속에 고립된 듯한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전주!

객사는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궁에 사셨던 “표옹 송영구” 선생을 만나고자 했으나 표옹 선생의 사정으로 뵐 수 없음에 그 안타까움과 보은의 징표로 객사에 들러 써주었다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의 현판으로 유명하다. 현판의 글씨는 초서(草書)체 작품이며, 가로 4.66m,세로 1.79m로 현존하는 현판 중에 크기가 단연 으뜸이라고 한다. “풍패”란 한고조의 유방의 고향지명으로 왕조의 본향을 지칭하는 것으로 전주가 바로 조선의 발원지로서의 그 높임을 우러른다는 뜻에서 전주객사의 본관을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하였다 한다.

“주지번”은 또한 표옹 송영구 선생이 조상분 들을 그리며 지은 집에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 주었다 한다. 이 망모당은 현재 익산시 문화재로 되어있다. “표옹”은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館) 자격으로 북경에 갔었는데 이때 조선의 사신들이 묶었던 숙소의 부엌에서 한 청년이 불을 지피면서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을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는 것을 듣게 되었고, 청년이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 보았다 한다. 청년은 지방에서 올라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 하였고 가져온 노자마저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고용인(조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표옹은 이를 불쌍히 여겨 틀리게 외우는 구절들을 바로잡아 주었고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몇 편을 필사하여 주었으며.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주었다고 한다. 이듬해 청년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 이었다고 한다. 주지번은 이후 “표옹 송영구” 선생을 평생 심중(心中) 스승으로 여겼다 한다. 이러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주지번은 직접 한양에서 전주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객사 대청마루에 앉아보니 그 옛적 스승에 대한 보은의 마음을 담아 붓 끝에 힘을 주던 주지번의 정성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전주객사는 풍남문과 더불어 전라 감영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보물이다. 한일합방 전후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전국의 객사건물의 대부분이 아무런 보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도시화의 진전과 함께 원형이 훼손 또는 소멸되었다. 전주객사는 과거에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서 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몇 년 전까지 주관과 서익헌, 수직사만이 남아 있다가 1999년 동익헌이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좌측의 동익헌은 원래 서익헌과 규모가 같았으나 1914년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도로확장 공사로 철거 되었었다 . 동익헌의 복원은 동측에 접한 객사길 정비로 인하여 원형복원을 하지 못하고 정면 칸수가 서익헌에 비하여 2칸 부족한 기형적인 모습으로 복원 되고 말았다. 우리의 보물은 일제강점기와 도시개발 및 도로정비의 수난사를 겪으며 그렇게 말없이 그 소명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외국 사신 및 정부 관료들의 연회장이요 숙소이자 위패를 모시고 궁궐을 향해 예를 올렸던 객사는 이제는 그 소임을 다하고 시간의 삶에 지쳐버린 피곤한 영혼들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낯선 시간의 세월 속에서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서 상징이 된 객사는 진실의 기다림과 새로운 출발의 다짐이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이시대의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우리의 보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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