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풍남문(豊南門) 전주의 역사다
김현종 · 2026-05-28 · 칼럼
전주에는 첫 글자가 “풍”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많다. 풍남제(豊南祭), 풍남문(豊南門), 풍남(豊南)초등학교,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 등이다.
“풍(豊)”자는 풍요로움을 뜻하는 글자다. 전주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전라도가 농업의 중심지였기에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상 “풍(豊)”자가 가지는 의미는 전주가 조선조 왕(王·전주이씨)의 본향이기 때문에 일컬어진 말이다.
전주객사의 현판에 “풍패”란 단어는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의 고향이 풍현, 패군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앞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중국사신 주지번은 객사현판을 통하여 전주가 태조 이성계의 선대들이 살았던 지역이었기에 조선왕실의 “풍패” 이며, 또한 “제왕의 고향”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라 경덕왕때 완산주에서 전주(全州)라 개칭된 천년의 고도 전주는 4대문을 가진 성곽도시였으며, 삼남(三南)의 거진(巨鎭)으로서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중심지의 요충적 역할을 하였다. 현존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는 경기전·객사·풍남문·향교 등이 옛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해마다 이를 보기위한 관광객의 발길이 잦다.
“풍남문”은 전주성의 남문이며 현재는 전주의 상징적 문화재가 되었다. 고려 공양왕때 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전주성과 함께 창건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 및 문헌비고 등의 자료에 의하면 1450년~ 1530년 사이에 그 규모가 기존보다 배 이상 확장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창건 후 전주성은 대, 내외적으로 여러 번의 참담한 시련을 겪게 되는데, 첫 번째 시련은 선조30년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전주에 진입하면서 성곽과 성문이 모두 파괴되는 참담한 수난을 맞게 된다.
그 후 1734년(영조 10년)에 전라감사인 조현명이 부임하면서 부성을 크게 개축하고, 4대문(남문, 상서문, 판동문, 증거문)을 다시 쌓았다. 남문은 성문 내외를 아치형의 홍예문(무지개문)으로 쌓았으며, 성문 위에 3층의 문루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명명 하였다고 한다. “명견루(明見樓)”라는 이름은 3층의 망루에 올라 보면 앞이 탁 트여 잘 보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음양오행에서 남쪽은 ‘밝을 명(明)’이다. 이는 후임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의 삶을 잘 돌보라는 경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두 번째 큰 시련은 개축 된지 30여년이 지난 1767년(영조 43) 3월에 전주성에 대화재(丁亥大火) 가 발생하는데 이때 성문 모두가 화마에 휩싸이고, 민가 1천여호가 불에 타버리는 전주 최대의 참사가 일어났다.
화재가 난 그해 9월 전라감사인 홍낙인은 3층이던 명견루를 2층으로, 2층이던 서문을 단층으로 복구하고, “풍패”의 글자를 한자씩 따서 풍남문(豊南門)과 패서문(沛西門)으로 바꾸어 명명하였다.
“풍남문”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으며, 동문과 북문은 영조 51년(1775)에 전라감사 서호수가 중건하고 동문은 완동문(完東門),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 불렀다.
홍낙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전주성의 정문을 풍남문이라 명명하여, 이곳이 조선왕조의 뿌리임을 주지번 이후로 다시 한 번 분명히 한 것이다. 서문은 현재의 다가동 파출소 근처, 동문은 동문사거리, 북문은 오거리쯤 된다고 한다.
전주성은 동학농민운동때 세 번째의 시련을 겪는다. 1894년 4월 동학군이 전주성의 남문과 서문을 통하여 들어오게 되고, 용머리고개에 진을 치고 있던 전봉준은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입성하여 선화당(구 도청자리)을 점거하였다. 동학군은 전주성 입성 후, 완산에 진을 치고 있던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전주성의 상당부분이 파괴 되었다. 이후 전주성은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철거되기 시작하여 1911년에 풍남문을 제외한 3대문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으며 전주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 자존심에 손상을 입게 된다.
현재의 풍남문은 1978년에서 1980년에 보수한 것이다.
풍남문의 성 안쪽으로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주가 호남의 수부, 수도라는 뜻이다. 일제에 의해 성곽이 헐리고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호남제일성의 정문 풍남문은 전주의 자존심과 위세를 견지한 채 제자리에 우뚝 서 오늘날 전주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옛 성곽도시 전주가 일제침략기에 이르러 우리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성곽과 문루가 참담하고 처참하게 파괴되었으나 시련으로 얼룩진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4대문과 전주성 복원을 통하여 “제왕의 고향”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문화화 역사도시로서의 찬란한 미래를 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