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전북에서 부활하다’ (1) 죽어야 사는 글, 사초

백승기 · 2026-08-10 · 한켠역사문화포럼

기록이 지켜낸 조선

불길은 모든 것을 삼켰으나 기록은 끝내 지킬 수 있었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도 실록만은 영원히 살아 있고  오백 년 세월은 한 권 한 권 민족의 기억으로 쌓여왔고  우리는 그 시간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의 길에 마주한다

칼은 사람을 쓰러뜨려도 붓은 시대 거슬러 역사 지켰고  권세는 한순간이지만 진실은 세월을 넘어 미래를 향했다  사관의 붓끝마다 나라 운명이 조용히 함께 숨 쉬었으니  한 줄의 사초마다 걸어서 역사 속으로 강물처럼 흐른다

왕은 백성을 다스렸으나 기록은 존엄한 왕들을 다스렸고  사실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묵묵히 붓 날 세워나갔다  목숨 걸고 써 내려간 한 줄은 천금보다 더욱 무거웠으며  사초 정신은 오백 년의 깊고 깊은 뿌리가 되어 살고 있다

오늘은 모든 국민이 사관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사관 시대  언론도 유튜브도 인공지능도 저마다 제 기록 남기며 산다  진실을 잃은 왜곡된 기록은 결코 역사가 될 수 없었으며  길 위에서 양심을 잃은 기록은 민족의 사초가 될 수 없다

실록은 과거를 읽는 책이 아니라 미래를 비추는 거울로  사초는 옛 조상님 기록으로 오늘 우리 양심을 되묻는다  후손들의 역사 탐방은 옛 역사를 찾아 걷는 길이 아니라  국민주권 시대 사초를 써 내려가는 새로운 여정이 된다

/백승기 (건축사·도시공학박사)

세종실록(태백산사고본) 세종13년 3월 20일 부분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은 전북이 지키고 보존한 국가유산이다.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1천893권 888책이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백승기 도시공학 박사, 김병남 전북대 사학과 교수, 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연구사(박사), 김세용 큰샘출판 대표 등 자문위원들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의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보고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인 실록의 보존과정과 함께 특히 전란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실록을 지킨 분들과 실록 이안 경로를 추적, 취재했다.

#사초 정신과 오늘의 언론  조선왕조실록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초(史草)다.  실록은 완성된 역사이고, 사초는 역사의 출발점이다.  사관은 왕의 언행과 조정의 논의, 시대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조선은 왕조 국가였지만 왕조차 사초를 볼 수 없도록 제도를 마련했다.  선조들은 권력이 기록을 지배하는 순간 역사는 진실을 잃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관은 권력의 편이 아니라 역사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사실을 감추지 않았고, 권세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후손 앞에 부끄럽지 않은 기록을 남기려 했다.  사초는 당대를 위한 글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사관은 붓 하나에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함께 걸었다.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과거에는 사관만이 기록을 남겼지만, 지금은 모든 국민이 역사 기록자가 되었다.

언론인은 물론 유튜버와 제작자, 블로거, SNS 이용자까지 누구나 사진과 영상,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기록의 생산 속도마저 더욱 빠르게 만들고 있다. 이제는 모든 국민이 사관인 ‘국민 사관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역사는 기록이 넘쳐난다고 진실까지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조회 수와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고, 사실보다 감정을 앞세우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맞는 내용만 골라 전달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진영 논리에 갇힌 유튜브와 편향된 콘텐츠는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여론을 움직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누군가의 해설뉴스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다. 뉴스보다 ‘뉴스를 해석해 주는 방송’을 더 많이 보게 되고, 사실보다 논평을 먼저 접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해설은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해설이 사실을 대신하는 순간 기록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선의 사관들은 자신의 의견을 앞세우기보다 먼저 사실을 기록했다. 평가는 후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초 정신의 핵심이다. 사실과 해석은 구분되어야 하며, 기록은 언제나 검증 가능한 사실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이 원칙은 달라지지 않는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지만, 진실과 거짓을 최종적으로 가려내는 책임은 결국 우리 사람에게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기록자의 양심은 더욱 중요해진다.

조선의 사관들은 목숨을 걸고 사실을 기록했다. 오늘의 기록자는 목숨을 걸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양심만큼은 걸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인의 책임이고, 유튜버의 책임이며, 국민이 사관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500년의 역사책이 아니다. 기록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사초 정신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가, 아니면 보고 싶은 사실만 기록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미래 세대가 읽게 될 새로운 실록이 될 것이다.

# 왕도 볼 수 없었던 기록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만일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을 조선시대의 왕들도 품었다. 그 중에서도 태종의 아들인 세종이 가끔 이런 마음이 들었나 보다.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으니 바로 ‘태종실록’이다.

임금이 “…이제 ‘태종실록’을 춘추관에서 이미 그 편찬을 마쳤으니, 내가 이를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떤가?”하고 말하니, 우의정 맹사성·제학 윤회(尹淮)·동지총제 신장(申檣) 등이 “이번에 편찬한 실록은 모두 가언(嘉言)과 선정(善政)만이 실려 있어 다시 고칠 것도 없으려니와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고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고 말하매, 임금이 “그럴 것이다!”고 말하였다.(세종실록 51, 세종 13년 3월 20일 갑신)

아들로서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을 것이다. 특히 세종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소위‘왕자의 난’을 일으켜 작은 아버지들을 죽였고, 왕이 되고 나서는 왕권 안정을 위해 외갓집 삼촌들을 처단하였으며, 세자인 큰 아들 즉 자기 형도 내쳤고, 자신을 왕위에 올리면서는 처갓집 장인도 죽였던 분이었다. 이 모든 게 어찌 보면 왕실을 위하고 세종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세종 본인은 알더라도 한 다리 건넌 신하들은 달리 볼 수도 있었다.

따라서 너무너무 궁금해진 세종은 마침내 위의 기록처럼 자신이 재위한 13년(1431) 3월 20일에 실록을 봐야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맹사성 등을 위시한 신하들이 딱 잘라 말한다.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라고. 다시 말해 당신이 아버지의 기록을 보고 마음에 안 들어서 고치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그러면 이후로는 왕이 두려워 기록을 남길 수가 없게 된다고 반발한 것이다. 너무나 타당한 반론에 세종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도승지 신인손에게 “옛날 제왕은 친히 조종의 실록을 본 사람이 제법 많았고, … 나는 또 ‘자손으로서 조종의 사업을 알지 못하면 장차 무엇으로 감계(鑑戒)할 것인가’하고,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상의하였더니, 유정현(柳廷顯) 등이 ‘조종이 정해 놓은 법에 의거하여 조종의 사업을 잘 계술(繼述)하는

목록으로 · 뱅기노자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