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21. 박중빈 대종사 - 소중하기에 감사하다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의식개혁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자
세상은 살판나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주어진 새 생명에 감사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이 세상 모든 존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하는 마음 앞세우면 자연이 곧 교실임을 알게 되고 하늘도 땅도 사람도 온갖 식물도 심지어 풀벌레마저도 존중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께서 한결 같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생명 존중으로 마른자리 가려주시고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잘 살라 하셨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좋다고 가르쳐 주시었기에 세상 만물을 다 존중한다면 그 중에 어떤 은혜가 가장 크겠는가
인간은 자연 환경을 벗어나 살 수 없는 삶이기에 시대적 요구의 상황과 대안을 아는 시대정신이 앞서야 한 시대 책임질 수 있다
추구하는 욕망에 따라 세상이 혼란할 수도 무너질 수도 있기에 출세욕으로 현장을 얼씬거리거나 역사경영에 끼어서는 안 된다
파란만장한 인류사를 선각자들이 지켜오듯 백년대계 천년대계를 예견하는 선각자의 안목으로 시대적 역사적 서당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임을 알고 누군가가 자신임을 알아 서원의 깃발을 들고 앞장설 때 어둠을 밝히는 일원一圓 원광 되어보자
▲ 구도 향한 심우도(尋牛圖)
고혜선
소태산 박중빈(본명 박진섭)은 1891년 음력 5월 5일 전라도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 영촌永村에서 아버지 박성삼朴成三과 어머니 유정천劉定天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세상 이치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아이 중빈은 13세까지 영촌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남쪽으로 400m 떨어진 구호동으로 이주하였고 15세 때 부모의 뜻에 따라 구호동 집에서 양하운과 혼인을 하였다.
소태산 박중빈의 청소년기는 우주 만물의 운용과 인간 만사의 작용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품고 그 원리를 깨닫기 위해 분투한 시기로 요약될 수 있다. 구수산(339m) 삼밭재 마당바위는 박중빈이 11세부터 5년 동안 우주 만물의 운용자인 산신을 만나기 위해 기도했던 곳이다.
어린 중빈의 기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그의 구도적 행보는 계속되었다.
처가에서 고대소설을 읽고 도사를 찾으러 다녔고, 짐승과 대화를 나눈다는 사람을 찾아 지리산을 찾아갔으며, 제갈량의 시를 읊는 걸인을 만나고, 지리산 천왕봉에서 수도했다는 사람을 집에 들이는 등 구도求道를 향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그런 상황을 구사고행상求師苦行相으로 표현한다. 스승을 찾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다는 뜻이다.
소태산 박중빈은 어디에서도 자신의 의심을 풀지 못한 채 1910년 최대의 후원자였던 부친을 잃고 나라의 주권마저 빼앗기는 아픔을 경험케 된다.
가장이 된 중빈은 기울어진 가세와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밥장사를 하기도 하고, 임자도 타리파시[大台耳島 波市]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자본주의의 실상과 물질문명의 폐해를 몸소 겪는다. 경제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내면의 의심은 풀지 못한 채 급기야는 입정入定에 든다. 그러던 중 1916년(그의 나이 25세) 4월 28일(음 3월 26일) 새벽, 정신이 맑아지며 모든 의심이 풀리는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대각을 이루었다.
▲ 생활불교로 전환하다
김설희
1916·丙辰)년 4월28일 이른 새벽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대각의 심경을 한 줄로 표현하니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그리고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 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모든 일이 은연 중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고, 모든 교법도 마땅한 바를 따라 응용하여,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고 내정하였다.
소태산의 친저로 1920년(원기5)경 부안 봉래정사에서 초안했던《조선불교혁신론》은 불교혁신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미래의 불법은 재래와 같은 제도의 불법이 아니라, 사 농 공 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세상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요, 불법 공부를 잘 하면 세상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것으로 , 또는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음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일원상一圓相을 신앙과 수행의 표본으로 제시한 점에서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을 중요한 표어로 내세웠다.
▲ 익산에서 원불교 근간을 이루다
윤재민
원기 4년(1919·己未) 3월에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全羅北道 扶安郡 蓬萊山 本名邊山) 월명암月明庵에서 10여일을 지냈고 10월에는 휴양과 교법의 초안 그리고 새회상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옆 몇 간 초당에 거처를 정하게 된다.
당시 월명암에는 한국 근대불교의 대표적인 고승의 한 사람.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장한 선사로, 월명암과 실상사에 주석하던 백학명스님이 있었으며 소태산과는 선문답, 소회를 나누는 각별한 관계였다.
이곳에서 원기 5년(1920·庚申) 4월에, 소태산은 새 회상의 핵심교리 즉 곧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三綱領·팔조목八條目을 발표한다.
원기 8년(1923·癸亥) 6월에 제자들은 큰 가르침을 펼 수 있도록 교통과 장소의 편리를 위해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고 원기 9년(1924·甲子) 8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북일면 신룡리(全北特別自治道 益山市 北一面 新龍里)에 그 터를 확정하였다.
이곳에서 <불법연구회>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종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ㆍ원예ㆍ양돈ㆍ양계 등 산업을 장려했고, 종교이념에 바탕 하여 도덕과 윤리로서 정신훈련을 시켰다. 1926년(원기11)에는 신정예법(新定禮法)을 제정ㆍ공포하여 허례허식에 떨어져 있던 당시의 낡은 예법을 개혁하여 간소하면서도 실질적인 예의 근본을 드러내고 이를 실천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화의 방향과 정신개혁의 구체적 실천운동, 교도훈련과 인재육성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모범적인 새마을운동 집단’으로 당시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창립시절부터 받아오던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교단해체의 위기에 처하면서도 소태산은 그가 하고자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전개시켜 갔다. 소태산은 그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원불교의 기본 경전인 《불교정전》을 완성하여 인쇄에 붙이고 1943년(원기28) 6월1일 열반에 들었다.
▲ 원불교는 한국의 민족종교다
신동만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불법을 바탕으로 새 종단을 건설한 것이 원불교이다. 과연 원불교는 민족 종교인가?
타민족에 대한 전도력이 미약하고 특정 민족 안에서만 포교되는 종교를 보통 민족종교라 한다. 일본의 신도가 그렇고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그렇다. 반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많은 인류가 믿는 종교를 세계종교라 일컫는다. 그리스도교(카톨릭+개신교), 이슬람교, 불교가 세계종교라 하겠다. 그렇다면 흰두교는 어떻까? 인도의 토속신앙이 브라만교와 융합한 종교로 신도가 11억을 넘지만 인도가 대부분이고 일부 네팔, 발리섬 등에 국한되어 있다. 또한 타종교와 배타성이 강하고 카스트제도 등 봉건적 계급제도가 있어 인도의 민족종교로 분류한다. 일본의 신도도 자연숭배 조상숭배의 전통이 일본 고유의 신앙화 된 것으로 인류 보편의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국민신앙 혹은 민족종교라 할 것이다. 유대교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강한 선민의식과 배타성 때문에 세계종교로 성장하지 못하고 민족종교에 멈춰있다.
그런데, 세계종교도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