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20. 조덕삼 장로 - 섬김으로 다시 태어나다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어둠을 밝히는 방주가 되자
참 신앙의 종교는 생명 빛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스스로 진리를 깨우쳐 이웃을 사랑하고 주를 찬미하는 것이다
폭풍속 망망대해의 방주가 되고 어둠속 길 밝히는 등대지기로 신앙촌 원평뜰에서 애민의 꽃향기 맡으며 밤엔 별을 맞이하자
내 몸을 태워 악귀 몰아내고 빈 가슴은 꽃향으로 가득 채우니 내 몸을 불살라 불빛이 되어 어둠을 걷어내고 광명천지 밝히자
순간 오해로 다양한 존재와 부딪히고 발생하는 사연이 일어나도 이해로서 쟁취는 배려로 단절은 화해로 살아보는 여유를 갖자
감람나무 물고 나는 비둘기를 보고 새 육지를 노아가 예견하듯 세계인류를 지키려 출범한 UN도 감람나무와 비둘기를 앞세웠다
기성세대는 노아의 심정으로 미래인류를 위한 방주를 준비하고 청소년은 인류 생명력의 선택된 빛으로 한 세상 비추어야 한다
청소년교육원 궁궐보다 더 크게 지었던 교육대왕 진흥의 역사 충심으로 나라 지키고 효심으로 생명 존중하며 역사는 흐른다
믿음으로 인류를 대하고 용맹으로서 정의를 실천하는 역사시대 청춘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고 방주가 되어야 한다
▲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고혜선
1908년 금산교회 장로 선택 투표에서 교인들은, 조덕삼이 운영하는 마방의 마부이자 조덕삼의 머슴 이자익李自益(1882~1961)을 장로로 선택하였다. 그때 장로 투표에서 낙선한 조덕삼趙德三(1867~1919)은 이 결과에 놀라고 불안해하는 테이트(Tate, 최의덕)[1862~1929] 선교사와 금산교회 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조덕삼의 진정성은 이후 이자익을 평양신학교에 다니게 하고 그 학비와 기숙사비 일체를 지원하였으며, 1915년 이자익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 최대진 초대 목사에 이어 이자익 목사를 제2대 목사로 청빙한 데서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자익 목사 또한 자신이 받은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여 1924년 제1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총회장에 당선되어 조선을 대표하는 신앙인으로 성장하였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자익 목사는 총회에 일체 참석 하지 않았고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1882년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부모를 잃고 고단한 삶을 살다가 1899년 남해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 하동에 도착하여 남원, 임실을 거쳐 김제 용화마을까지 흘러들어온 가여운 청년 이자익을 거두어 준 조덕삼은, 1904년 테이트(Tate, 최의덕)[1862~1929] 선교사가 용화마을로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평안한 미국 생활을 마다하고 가난한 조선 땅을 찾아온 숭고한 희생에 감동하여 테이트 선교사에게도 자신의 사랑채를 내어주었다. 주인은 사랑방에서 머슴은 마당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신앙을 키워온 두 사람은 그 신앙을 아름답게 실천하여 한국기독교의 귀감이 된 것이다.
▲ 금산교회에 서려 있는 우정과 신의
김주원
전라도 지방에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리는데 조덕삼과 이자익의 역할이 컸다. 조덕삼의 할아버지 조정문, 아버지 조종인은 평안도 출신으로 중국 봉황성과 고려 문을 넘나들며 무역을 하는 거상으로 유명했는데 재산을 정리하여 김제평야의 광활한 농경지와 금산의 금광에 대한 꿈을 안고 남하하여 금산에 정착하였다. 청년 이자익은 경남 남해 섬에서 어렵게 살다가 풍요로운 땅 전라도로 왔으며, 1897년 어느 날 금산 두정리에서 가장 큰집에 찾아들면서 조덕삼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조덕삼과 머슴 이자익은 전주에서 찾아오는 데이트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함께 믿게 되었다. 당시에 주인과 머슴이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양반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덕삼은 아들 조영호와 머슴 이자익이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선교사에게 사랑채를 내어주며 다함께 예배를 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사람 관계에서 평등의 가치를 실천한 금산교회의 출발이 되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1905년 10월, 세례를 함께 받았으나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고 선언하며 평신도와 장로의 관계로 성실히 자기 본분을 감당하였다.
이후 조덕삼이 금산교회 2대 장로가 되었을 때 이자익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으며, 이자익이 목사가 된 후 자신의 교회에 청빙한 일은 세계교회사에서 매우 드문 사건으로 기록된다. 빛나는 신앙생활을 하였던 조덕삼 장로의 후손에는 독립운동가, 장로,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이가 있었고, 이자익 목사 또한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어 다수의 장로와 목사의 삶을 살아가는 자손들이 배출되었다.
대전신학대학교 ‘이자익 목사 기념관 현판식’에서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국회의원)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고분자학 박사) 장로가 만났다.
이때, 이규완 장로가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참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더라면 지금의 저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조상들의 섬김과 나눔을 고마워하며 대를 이어 기억하니 마음이 훈훈하고 정답다.
위아래 없는 민주적 가치를 실천한 조덕삼은 청소년 교육이 중요함을 알고 유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청소년에게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나라 사랑을 고취시켰다.
근래에 대형교회를 건립하여 자식에게 세습시키는 행태를 볼 때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진다.
▲ 한국 근대사에 끼친 영향
신동만
우리나라 근대는 일반적으로 고종 즉위 해인 1863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로 분류한다. 이시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외세이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36년의 식민통치는 민족사의 최대의 치욕이었다. 다음은 미국의 기독교 전파다. 미국은 1884년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를 파송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그 후 8년 후인 1892년 남장로교가 일곱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들에 의해 전라도 선교가 시작되었다. 특히 데이트 목사 남매는 1893년 3월 24일 전주에 처음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전라도 최초의 교회인 전주서문교회(1893년)와 예수병원(1898년)이 세워졌다.
조덕삼 장로가 데이트 선교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동학혁명의 폭풍이 지나가고 수십만 명의 희생과 개벽의 꿈이 무너진 피폐한 동학의 땅에 이방인의 출현은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근대의 중요한 사회변동요인은 민초들의 의식향상이다. 그동안 탐관오리의 패악에 순응하던 백성들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며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좌절했지만 그들의 희생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
높아진 민도를 반영하여 이뤄진 갑오개혁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추진된 한계는 있지만 조선을 변혁시킨 전환점이었다. 왕권 중심에서 벗어나 법치주의와 현대적인 행정체제를 도입하여 6조를 폐지하고 내각을 설립하였다. 세제개혁을 통해 토지세를 통일하고, 상업 활동의 규제를 완화하고 새로운 화폐제도를 도입하였다. 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식 교육과정을 마련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1908년 사재를 털어 유광학교를 설립하고 지역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우리 역사, 성경 등 신학문을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가장 큰 개혁의 핵심은 신분제 폐지이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의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게 되었으며 조선이 근대국가로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수천 년 내려온 신분제의 폐단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리는 만무했다. 양반들의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하나님 아래 만민이 평등하다고 외친 기독교조차도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 장로 선출 시 백정이나 갖바치 등 천민이 선출되면 양반 신자들이 이탈하여 따로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조덕삼은 열두 살이나 아래인 자신의 머슴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다. 좋은 처자와 혼인을 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