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17. 전봉준 장군 - 제폭구민 보국안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영웅호걸은 가고 역사는 흐른다
영웅호걸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역사가 성현을 출현시켰고 영웅은 가더라도 역사는 살아 숨쉰다
조국엔 내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가 있었기에 우리강토는 민초들이 지켜냈고 백성이 번영을 시키며 늘 함께하였다
성군이 등극하면 보좌를 위한 위대한 성현들이 동행 했고 암군이 등장하면 역사를 지탱하는 영웅호걸이 웅거하였다
나라가 특정인 소유가 아니라 백성의 집이었기 때문이었고 나라의 역사는 주역이든 들러리든 결국 국민이 전담했다
시대정신을 아는 능력자가 역사를 위해 봉사하는 시기는 그 시대마다 풀어야 할 역사적 소명과 시대정신이 있었다
개인의 탐욕과 욕망으로 출세를 무대로 삼으려는 자로인해 사회가 얼룩지고 시대정신의 동맥정맥이 막혀서는 안된다
나라가 곧 나라는 의식이 있어야만 위대한 나라를 만들고 국민이 곧 국가인 나라 국민이 주인인 시대 열어야 한다
어느 분야든 제 몫을 다하고 시대 소명과 숙명을 찾으며 각자의 공로가 인정받는 정의로운 사회를 열어가야 한다
국가도 국민도 반드시 함께 풀어야 할 숙제 있다는 것에 공감하고 역사 경영에 동참하도록 이정표 세워야 하겠다
국가는 홍익인간 공동체로 역사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고 지구 평화시대 열어 가는데 앞장서는 국민 되어야 한다
▲ 사람이 제일 귀하다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핵심인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도화선이 되어 전봉준의 지휘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1차 농민전쟁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2차 농민전쟁은 전라도는 물론 전국으로 확산했으며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싸웠으나 일본군에 의해 우금치에서 패배했다. 동학농민군은 비록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 사상과 운동의 정신은 유유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기록물들이 지난 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한국 사회의 근대적 전환에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및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근대적 봉건주의 사회에서 근대민주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이며 실험적 단계였다. 동학이라는 의미도 서양의 종교와 학문에 대립되는 것으로 19세기 후반의 경제 파탄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 등 사회문제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비록 그들에 의한 성공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국 민중들이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고 평등사회를 해결하고자 무장투쟁을 벌인 것은 세계사적인 모범이 될 만한 사건으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도층에 저항하고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이다. 혁명 과정에서 동학군은 집강소라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체제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를 통해 그들은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았다. 이러한 형태의 거버넌스는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19세기 당시까지 유사한 제도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이 번영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놓았으며, 유사한 외국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중국군과 일본군의 조선으로의 군대 파병, 이로 인한 청일전쟁 촉발과 일본의 승리로 이어져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해체를 촉발시켰다. 동학농민혁명의 유산은 어떻게 민중이 주체가 되어 역사를 보편적 가치, 즉 평등, 자유, 인권, 정의의 방향으로 전진시켜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의 저장소이다.
▲ 전봉준 발자취를 찾아서
김주원
전봉준은 조선 말기 동학과 농민 운동사에 중요한 인물로 기억한다. 천안 전씨로 그의 시조 전섭은 백제 개국공신으로 일본에 자주 드나들며 문물을 전해준 인물이다.
전봉준은 전라도 태인에서 살다가 30세쯤 고부 마을로 이주하여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도 하고 풍수지리에 밝아서 이웃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하는 등 재주가 많았던 사람이다.
1890년, 전봉준의 나이 36세 때 동학에 입교하여 2년 후 고부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이즈음에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지내면서 사상적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1892년 4월 고부에 조병갑이 신임군수로 임명되어 와서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세금을 거둬들이며 농민을 수탈하였다. 걷는 세금의 종류가 늘어남에 농민의 불만은 커져가게 된다. 마을 일을 돕던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조병갑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매질을 당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전봉준은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하여 1894년 1월에 뜻을 같이하는 천여 명의 농민들과 고부관아로 진격하여 무기고 접수, 억울한 죄인 풀어주기, 수탈한 쌀을 농민에게 나눠주기 등 전봉준은 의협심 넘치는 행동으로 많은 농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게 되었다. 농민봉기의 규모는 더욱 커지게 되고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쳐들어가니 조정에서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게 되고, 이에 일본도 조선에 강제 상륙을 하면서 청일전쟁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연이은 전투로 뒤떨어진 무기와 열악한 환경으로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관군에게 쫓기는 몸이 된 전봉준은 입암산성~입암산~장성새재~순창새재~백암산~사자봉을 거쳐 백양사 청류암에 잠시 은신하게 된다. 등산객들은 다들 알겠지만, 백암산 상왕봉에서 청류암으로 접어드는 곳은 산세가 험준하여 다가가기 어렵다.
청류암엔 전봉준이 마셨다는 남천감로수가 잘 보존되어 있으니 이곳을 지나는 산객은 청명한 남천감로수를 마시며 전봉준의 고귀한 뜻을 한 번 새겨 보시기를 권한다. 청류암을 빠져나온 전봉준은 옛 부하였던 순창 쌍치 피노리에 있는 김경천의 집을 찾았다가 그의 밀고로 붙잡히게 된다.
전봉준은 초야의 선비였다. 불의를 보면 앞장섰던 가난하지만 당당했던 선비다. 작은 체구에 눈은 샛별처럼 빛났고 가슴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농민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를 타도하고자 했고 후에는 청과 일본, 서양의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외쳤던 것이다.
▲ 녹두장군 전봉준
백승기
녹두장군 전봉준은 평범한 시골 훈장님이다.
조선말기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국의 위상과 민족혼의 자존감을 찾으려 했던 위대한 혁명가요 실천적 사상가이기도 했다. 동학이 보여준 정신은 훗날 3.1운동과 독립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근대 민주주의의 시효始曉가 되었다.
조선을 망하게 한 3대 요인 중 하나는 전라도 아전 문화로 고부군수 조병갑은 대표적인 탐관오리의 표상이다.
아전의 극심한 횡포와 외세에만 의존한 무능한 조선은 결국 백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물러가게 된다. 격변기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군은 1894년 전국적인 봉기를 하고 역동적 활약을 하였으나 관군 및 일본군의 위력에 밀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장군의 슬픔을 후세는 노래로서 임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일본의 침략으로 우리는 100여 년간 민족전통문화의식의 문화 공백기를 겪으며 민족혼에 잠재되어 있는 의병, 의사, 열사기질을 발휘하며 근근이 역사를 지켜왔다.
스스로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라 자랑하면서도 전통문화가 계승 전승된 것은 별로 없고 광복국인지 독립국인지 조차도 모르면서 천국아래 한국이길 바라며 오로지 경제대국에만 매진해 왔다.
성인요세출聖人要世出이다. 성현도 영웅도 시대가 요구해야 나타난다는 뜻이다.
▲ 장군과 경허선사
신동만
전주화약으로 동학군은 전라감사와 협의 하에 각 군현에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했다. 탐관오리 엄벌, 횡포한 부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 징벌, 노비 문서 소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