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16. 반계 유형원 - 부안 우반동에 오다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조선이여! 이제 틀에서 나와야 한다

​단체 사진을 받는 순간 자신을 찾아봄이 최우선 과제이며 세상엔 대단한 인물도 있지만 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세상 어마어마한 건물도 있고 위대한 인물도 많고 많지만 그 안에 내가 없다면 감탄하고 부러워할 이유가 있겠는가

잘났든 못났든 내가 있어 한 번 살아볼 만한 이 세상에는 온갖 도덕 법률이 거미줄처럼 운신의 폭을 제한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든 치외법권적 성역인 소도가 존재 하였고 부안 우반동 그곳이 내 생각 내 행동 내 혼인 십승지지다

조선조 학문의 최종목적은 출사로 이어진 정치 일변도로 인물 병목 현상을 만들었고 왕조는 당리당략에 휘말린다

정치발전 도모하려던 유림은 대립과 갈등이 고조 되었고 유림정파는 첨예한 이해관계에 맞물리며 정적만 양산한다

신 지방자치 민주주의로 온 국민을 정치무대로 끌어들이고 개인의 개성과 존엄 무너지며 맹목적 분권대결 구도이다

학자도 기업도 심지어 종교인도 목표가 정치적 위상으로 출세길로만 측량되기를 열망하는 역사인물의 병목현상 시대다

​인간이 사는 지구 밖에 우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구가 바로 우주선이니 무시무종 우리가 바로 주인이다

수평선 평선 밖에 수평선 너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서 있는 여기가 역사현장이고 우리가 바로 역사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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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의 비조

​반계는 32세의 나이로 9대조 유관의 사패지賜牌地(임금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인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면서 여러 차례 전국을 유람했다.

우반동에 거주하며 사회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31세 때부터 집필을 시작한 반계수록은 49세 때 완성됐다.

​1670년에 완성된 26권짜리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사상과 국가 건설 계획을 담은 걸작이었으며 반계수록 외에도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수십 권의 저서를 남겼다.

농토는 농민에게 근본이다.

김주원 반계 선생은 전라도 태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서 위대한 <반계수록>을 저술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반계선생과 우반동의 관련은 선생의 9대조가 임금에게 사패지로 하사받고 조부 유성민이 이 땅을 개간하면서 부터다. 조부의 삼년상을 치르고 식솔을 거느려 곧장 우반동에 은거하게 되는데, 연이은 가족의 불행과 2번의 과거 낙방으로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매진하게 된 듯하다. 반계선생의 우반동 이주는 32세(1653년)로 5~6년간 조선 전국을 탐방하고 돌아와 ‘반계수록’을 저술하게 된다.

반계서당 자리에 올라보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너른 평야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기암괴석의 변산, 오른쪽에는 광활한 서해가 보인다. 폭넓은 안목과 사상적 깊이를 더해 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로 보인다. 우반동에서 만난 농민들과 어울려 사는 것에 푹 빠지게 되면서 농민의 노고를 보고 느끼며 애환을 함께 나눴다.

​농토가 농민에게 근본임을 생각하고 경작지 분배와 이를 위한 토지개혁 의 필요성을 기술한다. 이것이 부민ㆍ부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등에게 영향을 주었고 경세치용의 이념을 기록한 ‘반계수록’을 탄생시킨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을 실학의 메카로 융숭한 대우를 해야 한다. 실학의 메카로 가꾸기 위한 부안군과 부안문화재단 등 자치단체의 노력이 있으나 좀 더 절실한 노력과 연구가 있어야겠다. 부안군은 지형적, 문화 예술적으로 뛰어난 소재를 품고 있는 곳이므로 활기찬 지역으로 거듭나기를 손모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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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국가 생명력

​백승기

반계 유형원(1622~1673년)은 실천가이기 보다는 은둔 사상가로서 조선 실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실학의 비조(鼻祖)다.

‘토지는 골고루 정당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면 나라는 저절로 부강하게 된다.’는 유형원의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기존 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았던 이理와 기氣, 도道와 덕德, 체體와 용用에 대응하여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균전론均田論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은 토지개혁의 핵심이었다. ​아쉽게도 유형원은 생전에 반계수록을 출판하지 못했다.

혼란한 시대적 상황과 인조반정 이후 역모 가문이 직면한 태생적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일반 사대부들처럼 출사도 하지 못하고 부안 우반동에 내려와 은거하며 지병 치료와 저술 활동에만 집중하였다. 이때 전라도 지역의 인사들과 다양한 교류를 하며 그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고 김서경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한 것으로 보인다.

반계수록이 허균(1569~1618년)이 저술한 ‘홍길동전’처럼 생전에 발간 되었다면 유형원 또한 역모죄로 몰려 처단 되었을 지도 모른다.

허균을 비롯한 조선의 개혁파와 실학은 중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던 명대말의 양명학 사상가 ‘이지(1527~1602)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지는 ‘분서’에 지인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서신과 독서평, 잡술, 그리고 시가라는 다양한 형태로 사회 모순을 고발하였고 그 만의 개혁 사상적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마음은 편애도, 차별도, 불평등도 없는 하늘과 한마음 이었다’라는 동심설童心說을 중시했다.

우리 한민족은 우주와 역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하늘天과 땅地 인간人이 본래 하나임을 알고 신시라는 공간에 시간의 좌표를 설정하며 생명 존중의 홍익인간 재세이화 문화를 열었다. 하나의 울안에서 오고 감도 알았기에 죽으면 온대로 돌아가심으로 죽음을 한글로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였다.

현대사회는 분업화된 사회 구성으로 인해 국민의 특성과 개인의 존엄이 정치적 위상과 경제적 잣대로만 가늠해지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생존 경쟁력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드림메타버스시대 실사구시는 국민 각자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 경쟁력을 만들고, 고질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병목 현상을 풀어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역사를 경영하고 문화 생명력의 주역으로서 새 역사를 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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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사상을 담은 미래의 리더

윤재민

2023년은 반계 유형원 선생의 탄신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형원선생은 15세 때 병자호란을 피해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시작으로 20여년간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금강산, 호남지방,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며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보았다. 이때 직접 보고 느낀 점들이 반계수록의 출발선이었을 것이다. 조선 십승지지의 땅 변산 우반동에 32세부터 은거하며 52세까지 20여 년을 연구하고 집필한 것이다. 2023년 8월에 부안의 새만금에서 세계잼버리대회가 열리고 세계 청소년 4만3,000명이 12일간 머물게 된다. 반계수록에 담긴 실학사상을 미래의 지도자들이 될 세계 청소년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반계 서당을 방문하였다. 반계 유형원 선생이 서당 앞 반계정에 걸터앉아 세계잼버리대회에 참석한 청소년들이 땀 뻘뻘 흘리며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흐믓하게 바라보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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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 국가

​신동만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유형원이 조상의 사패지인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칩거하며 20년간 연구하며 저술한 26권의 역작이다. 토지제도, 재정·상공업 관계, 교육제도, 관료제도, 정부기구, 군사제도, 축성·병기·교통·통신 관계, 지방제도 등으로서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유형원은『반계수록』 이외에도 정치, 경제, 역사, 지리, 군사, 언어, 문학 등 다방면에 수 십 권의 저서를 남겼으나 전해지지 않았다. 병법, 음운 등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의 저술이 후대에 전해졌다면 정약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 존경받았을 것이다.

​반계는 일정한 스승 없이 공부했으나 고모부 김세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세렴은 대사헌, 도승지와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시문詩文도 뛰어나 당대 제일의 인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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