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14. 이매창 - 도솔천 월명암에 올라서

김현종 · 2026-05-27 · 자유

매창이 도솔천 월명암 선녀가 되었다

​굽은나무 선산 지키듯이 부모님이 지키시는 우리 고향산천 당산나무 소도 솟대 뿌리내린 처처마다 까치둥지 틀었다

부안현 계생 이매창梅窓시인 이탕정의 여식으로 태어나서 한 시절 한 맺힌 글 휘감으며 허균 유희경 도솔천 오른다

​산새들 새소리를 내고 짐승은 제 어미 소리에 몰려가듯이 인간은 말씨 다듬고 그에 걸맞은 글씨로 시문을 만들었다

우리 한글은 뜻 말로서 우리 말씨를 소리글로 만들었기에 우리말만 알면 세상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각성 한글이다

​하늘과 땅 사람이 본래 하나임을 알아 생각해낸 한글문화 뜻 말 소리글자인 한글이 정립되면 지구촌이 공감을 한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 허균과 매창의 원력으로 나고 짧은 생 큰 업적을 남긴 영웅호걸들이 민족의 혼불이 되었다

​바다에서 가장 높고 육지에서 가장 낮은 연안 갯벌에서 인류는 한 맛으로 조개무지를 쌓으며 역사를 경영하였다

도시는 신문명 시대를 추구하면서 지구위기를 초래하니 높낮이 없는 새만금 갯벌 터에서 생명 구실이 절실해진다

​신선이 먹으면 선식되고 선녀가 먹으면 선녀식 된다하니 내가 신선이고 선녀라면 세상 어딘들 무릉도원 아니던가

서해 용왕 수성당 할미 칠산 바다에 연줄로 인연 맺듯이 새만금방주 연화등대로 서원 깃발을 들어 수인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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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명암에 올라

​이매창은 1573년 부안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3년 동안 머물다가 다시 고향 부안으로 내려와 생활한다.

시조와 한시, 가무와 거문고·가야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명기(名技)로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로 쌍벽을 이루었다. 또한 허난설헌,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3대 여류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와 한시 58수를 남겼고 작품으로는 ‘매창집’이 전해지고 있다.

매창은 당시 인품이 출중하고 시에 일가견이 있었던 유희경(1545~1636)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두세 번. 다만 시로써 서로의 그리움을 표현하며 명작을 남긴다. 허균과 함께 월명암에 오른 매창은 그리움을 삭히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길 담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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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혼(詩魂) 여전히 심금 울리네

​ 신동만

매창은 유희경, 이귀, 허균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시의 주제는 사랑이다. 특히 이별한 님을 그리는 그리움은 애절하다.

첫사랑은 28살 연상의 유희경(1545~1636)으로 평생 동안 연모했다. 그는 비록 천민 출신이지만 임진왜란 후에 면천되어 양반이 되었다. 영의정이 된 박순에게서 시문학을 사사 받았으며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작(詩作)을 주도했다. 유희경과의 만남과 이별 속에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명작 시조가 탄생했다.

​문장과 한시에 능했던 조선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이었던 허균도 매창의 시와 거문고에 반하였다. 그와의 교류는 그녀의 시문학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하는 일대 전기가 되었다. 허균은 누나 허난설헌의 시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가져온 많은 중국의 시를 매창에게 소개했으리라. 허균 등과 함께 변산을 유람하며 월명암에 올라 지은 “복축난약의반공(卜築蘭若倚半空) 터를 잡아 지은 절이 공중에 떠 있고~”시가 있다

이 시의 취객은 허균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유희경만을 연모하며 정절을 지키는 매창과의 관계를 문학적 교류와 정신적 유대만으로 부족했던 허균이 술을 핑계로 수작을 부렸음 직하지 않는가? 여튼, 정신적 교류에만 미쳤던 그들은 10년이 넘도록 인연이 이어졌다. 매창이 말년에 참선을 시작했고 선시(禪詩) 계열의 한시(漢詩)를 짓게 된 것은 분명 허균과 허난설헌의 영향이다.

허균은 그녀가 죽은 후, ‘애계랑(哀癸娘)’이라는 시 두 편을 지어 그녀를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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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명암에서 찾아본 매창의 발자취

​ 김주원

월명암에 오른 시인 이매창. 이매창과 허균은 월명암에 오를 때 어느 길로 갔을까!

내소사에서 관음봉을 거쳐 직소폭포로 하여 월명암 도착.

봉래구곡을 거쳐 실상사로 올라 월명암 도착 남여치에서 쌍선봉을 거쳐 월명암에 도착하는 거리는 짧으나 이매창과 허균이 남여치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남여치에서 쌍선봉까지 1.5km가량 급경사를 올라야 해서 숨이 몹시 거칠어졌지만 이매창과 허균의 발자취를 느껴보기 위해 일행과 상황극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1591년 갓 스무 살이 된 이매창은 상례학에 밝았던 촌은 유희경을 만나 단박에 연모하게 된다. 그러나 짧은 만남, 기나긴 헤어짐을 반복하며 애끓는 삶을 살았다.

심신이 지친 이매창은 불운의 천재 혁명가 교산 허균과 변산을 유람하며 월명암에 오른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월명암은 심신이 지쳐가는 이매창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었을 것이다.

‘월명암에 올라’ 시를 통해 신선 세계에 들어온 듯 하다는 감흥을 보여주었다.

천한 신분 관기임에도 시문에 능하고 거문고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고 기품이 있어 많은 문인들, 특히 천재적 시인 허균과의 교류함에 있어 넘치지도 모자람도 없이 살다간 이매창의 삶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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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동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 윤재민

꽃다운 이매창이 18세 무렵,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 두 사람이 나눈 시를 통해 살펴보자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쓴 매창의 시를 쓴다. ​유희경을 생각하는 애끓는 그리움이 안타까울 정도다. 한양에서 유희경이 매창을 생각하며 답장을 쓴다.

​시는 얼핏 보면 무심한 듯 전개된다.

그저 그립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일깨워 주는 무정함이랄까?

매창은 특히 거문고를 잘 연주했으며 병으로 죽자 그녀의 유언대로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거문고를 만드는 최고의 재료는 ‘석상오동石上梧桐’이다. 돌 틈에서 자라다 말라 죽은 오동나무(석상자고동石上自古桐)이다. 마지막 구절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에서 오동나무는 매창의 거문고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유희경의 매창을 그리는 애절함이 잘 나와 있다.

매창과 유희경의 슬픈 사랑을 330년이 지난 오늘 시를 통해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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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우정 사이

​ 박창보

부친 이탕종으로부터 배운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개성의 황진이와 함께 조선 명기의 쌍벽으로 불린다. 관노로 추정되는 모친에다 서녀 출신이었으니 양반가에 시집은 못가고 기녀가 되는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여류 문장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의 문학작품 매창집에 한시 57수와 시조 1수가 전해진다. 신분에 대한 한탄,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 자연과 운명에 대한 순응과 속세의 초월, 내세의 행복에 대한 염원 등이 담겨 있다. 여필종부와 삼종지도를 강요했던 조선시대의 규범에서 벗어나 기녀 신분은 비교적 성적으로 자유롭고 예술과 문학 등 재능을 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38세의 짧고도 한 많은 여생이었지만 어쩌면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삶의 달인이 아니었을까?

​직소폭포, 매창과 더불어 부안 삼절이라 불리는 촌은 유희경(1545~1636)은 천민 출신의 문인이다. 한시에 능통하여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했으며 국장이나 사대부가의 장례 예법에 밝았다고 한다.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문에 능한 백대붕과 함께 유백이라 불리며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면천이 되었는데 매창과는 그 이전에 만났을 것이다. 당시 유백과 매창의 문장은 서로가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18세의 매창이 만난 유희경의 나이는 46살의 할아버지뻘 이었다. 그럼에도 매창의 첫 번째 정인이 되었을 때는 문장이 통하고 상호 신분의 애환과 아픔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남의 전운 판관이 되어 전라도로 내려간 32세의 허균(1569년~1618)과 만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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