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11. 황박 장군 - 웅치전투의 영웅
김현종 · 2026-05-27 · 자유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화랑으로 청소년 일깨운 진흥교육대왕이 역사 세웠고 고구려는 옛 강토를 최대로 회복한 광개토국토대왕 건재했다
조선의 바다는 거북선으로 나라를 지킨 이순신장군 있었으며 육지는 부친 상중에 출전 의병 황박(黃璞)장군이 선봉에 섰다
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의병에게는 지켜야할 조국이 있기에 국경선 만들고 육지와 바다를 지켜내 민족 안녕을 도모했다
국토수호 누가 시킨다고 할 일이며 댓가 바라며 할 일인가 한번 뿐인 인생 민족의식 고취 당리당략 역사침탈 막아보자
서인동인 당파정권 장악 재물로서 두 날개 꺾이고 쓰러지며 선조 등에 밀려나간 이들 발길에 밟혀 절름발이 조선 되었다
변명도 재기도 심지어 보상조차도 외면하며 날개를 잘릴 때 모진 생명들 역사 날개 지키겠노라 이치(梨峙)에서 순절했다
수많은 외침(外侵)에 의한 외래문화로 우리 역사는 왜곡되고 수입종교로 민족사상 편집되며 생명 구심점인 역사인물 없다
급조된 민주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시시비비로 역사 단절되고 민족의식 상실한 채 사리사욕을 앞세운 시대정신만 난무하다
제 공로 인정받는 정의로운 사회 실천으로 복지나라 초석다져 민족의 구심점이자 성지가 될 역사인물 완주에서 부활시키자
왜곡된 민족사 가치관 바로잡고 민족역사 중심에는 홍익으로 황박의 호국정신 계승하며 조국 평화기원 역사를 만들어보자
▲ 웅치, 이치전투와 황박
박창보
영화 ‘한산’을 볼 기회가 있었다.
마침 ‘걸어서 역사 속으로’ 프로그램에 참가, 웅치전적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왜장 와키자카가 해전과 더불어 전라좌수영을 접수하기 위한 합동작전을 구상하고 육군을 투입하여 전주성 점령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앞서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사로잡힌 왜군 중에 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에 감복한 준사가 마침내 투항을 한다. 이중첩자로 명을 받고 웅치로 가 정보를 전하고 막 시작된 전투에서 함께 싸운다.
임진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하자 왜군은 장기전을 대비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접수하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하장수인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하는 왜군을 맞아 부친의 시묘 살이 중이던 전주만호 출신 황박이 의병을 모아 금산전투에 참가한다.
곽재우 장군에게 일격을 당했음에도 금산을 점령한 왜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전주성으로 향하였는데 두 곳 험난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완주군에 위치한 웅치(곰티재)는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운장산 자락이며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다른 길 이치(배티재)는 대둔산 자락의 험한 지형으로 접근이 용이치 않다. 조선의 1천여 병력에 비해 10배나 많은 1만여 왜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한 날이 1592년 7월 8일(음)이다.
웅치로 물러난 황박은 1방어선을 구축하고 좁은 험지에 의존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후퇴하며 2방어선을 지키던 나주 판관 이복남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활과 화살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 또 다시 물러나 3방어선을 지키던 김제 군수 정담과 합류하였지만 끝까지 분전하던 정담을 비롯해 장졸 모두가 전사하였다. 만약을 위해 후퇴한 이복남과 황박은 남원에서 합류한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안덕원전투에서 승리한다.
8월 13일 이치에 출몰한 왜군은 권율장군 휘하의 선봉장 황진에게 막혔다. 무재가 출중했던 황진은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왜군의 집중사격으로 황진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후위에 있던 황박이 구출하는 과정에서 정작 자신은 지키지 못하고 전사하였으니 오호! 통재라. 그의 나이 겨우 29세였다.
권율장군과 처영대사의 활약으로 조선군이 힘겹게 승리함으로서 전주성을 지켜 이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수 있었다. 두 장군은 후일 행주에서도 승리한다. 이어 벌어진 금산탈환 작전에서는 의병장 조헌과 영규스님이 전사하였다.
이때의 승병에 대한 기록 또한 빈약하다. 호국불교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조사, 연구가 제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바른 역사를 위한 여러 할일 중 위대함을 위한 작은 행보가 아니겠는가. 황진 또한 임지를 떠나 경남 진주성을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안타깝게 전사하였다.
▲ 임진왜란과 웅치전투와 이치전투
김주원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열어갔다. 대항해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재발견함으로써 전 지구적 국제무역을 가능하게 하였고, 유럽 식민제국을 탄생시켰다. 동반구와 서반구 사이에 교류를 촉발시켜 유럽 문화와 기술이 밖으로 확산되는 과정이었다. 유럽 열강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중국 도자기 인기가 대단하였는데 왜구는국내 혼란한 정치와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명나라를 침범하기로 결정하였다.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을 통과한다고 하니, 명에 대한 사대사상을 지닌 조선 조정에서 반대하자 이것을 트집 잡아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 공납 제도 등이 문란해지며 사회 전반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구는 이틈을 이용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 지시로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고 충주의 탄금대까지 대패하니 왜군을 한양까지 삽시간에 도달할 기세다.
이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니 분노한 백성들은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항거하고 승병들도 나서서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조선의 최대 곡창지대 전라도의 전주부성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의병과 합류하여 진안과 전주 사이의 웅치(곰티재)와 진산의 이치(배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조선은 정치적 실정이 나라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것을 틈타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쫓겨 간 임금과 신하들을 보고 백성은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고자 혈투를 벌였으나 피해는 더욱 컸다. 당시 관료였던 이산해의 시 <노방원>으로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기록하였다.
길가에 죽어 있는 세 사람 모두가 유랑하는 사람들이라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었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차마 보지 못하였다.
굶주린 사람들이 살 베간 사람 뼈만 앙상하고 살 한 점 없도다.
전쟁이 7년 만에 끝나고 유럽과 교역을 하고 있었던 왜구는 돌아갈 때 조선의 수많은 도공을 잡아갔으며 백성들을 유럽에 노예로 팔았다 한다.
유성룡은 다시는 이러한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며 후세에 길이 남길 바라는 반성의 기록으로 저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손들은 징비록의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혜롭지 못하여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에 36년간 지배를 받고 말았다.
▲ 호남의 영웅으로 기리자
신동만
2022년 9월 19일,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대둔산휴게소 옆 이치전적지에서 황박(黃璞) 장군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완주군수를 포함하여 200여명 인근 주민들이 참석하였다. 특히 정세균 전국무총리는 기념사에서 "웅치전투와 이치전투는 호남을 지켜 낸 중요한 육상전투로 특히 황박 장군은 두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라며 "이번 제막식을 계기로 전국에 황박 장군의 기개와 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해 여름 그가 쏟은 의혈과 충혼 이곳에 잠들어 불멸의 호국정신으로 겨레의 앞날을 영원히 밝히리라.”
추모비의 문구는 정세균총리가 직접 작성하였다.
황박 장군의 호는 죽봉(竹峰)이다. 우주황씨(紆州黃氏)로 우주는 전북특별자치도 왕궁 삼례 봉동 비봉 일대의 옛 지명이다.
1564년 전주부 우북면(현 왕궁면) 장암에서 태어나 19세 젊은 나이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비변랑을 거쳐 전주만호(종4품)로 봉직하다 1590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3년 시묘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