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10. 정여립 - 미완의 혁명가

김현종 · 2026-05-27 · 자유

빛이 그림자 만들고 천지인(天地人)이 하나

​동족상잔의 역사적 아픔을 아직도 치유하지 못한 대한민국 자유경쟁으로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염원했다

민주 경제민주 복지사회 자유문화 천하공물 홍익정신으로 조국의 명예와 국가 안보 경쟁력은 국민 눈높이로 맞춘다

​사람으로 태어나 흐르는 세월 무슨 일을 얼마나 할 수 있고 지붕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데 사람이 제몫 없을까

하늘의 농사도 일 년씩 걸리듯 역사도 성사될 때가 있기에 당대 발복 못하면 후대 광명 발복을 위해 혼신을 다 했었다

​짧은 생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웅호걸이 얼마나 많았으며 곳곳에 추켜세운 영웅호걸 상들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리까

빛이 그림자 만들어 일조권을 따지면 잣대가 서로 다르기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가 다 만물의 머리를 쓰다듬진 않는다

​지구 46억 년의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재확인 하려 하고 조상님들은 태양 도시 신시(神市)를 열어 개천(開天)하였다

지구엔 담수 해수 만나 처처에 조개무지 역사 막을 올렸고 생명문화 사람중심 문화로 내가 나라라는 역사를 시작했다

​중국 황하문명 이사팔로 8꽤 8방 8인으로 나누어 분리하고 홍산문화 삼육구(369) 천지인(○□△)으로 삼세번 다듬었다

내가있어 한울 네가 있어 두울되니 네울로 다서니 다섯이다 다시 세워 하늘을 열어 하늘되려하니 열 개천開天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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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다.

1567년(명종 22년)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3년) 과거에 급제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1580년(선조 16년) 예조좌랑이 되었고 1585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 박순(朴淳)·성혼을 비판하여 서인의 미움을 받고 선조의 신망을 잃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뒤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사람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키고 대동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1587년(선조 20년) 왜선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을 받아 대동계를 동원하여 왜구를 격퇴했다. 이후 대동계 조직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과 모사(謨士)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㶐寅)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정여립은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피신했으나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 학문과 사상

​정여립은 주자(朱子) 사관(史觀)이 정통으로 여겨지던 조선사회에서 주자 사관과 배치되는 사마광(司馬光) 사관을 찬양했고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을 설파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관 및 절대군주를 부정했으며 주자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정여립의 사상은 주류에서 이탈하여 고루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사상이었으나 조선의 사상계를 주자 성리학 중심으로 이끌어 가려는 세력에게는 매우 불온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여립의 사상은 성리학의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실천행위, 즉 민생문제 해결에 더욱 비중을 둔 것이었다. 또 대동계 조직때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인물들을 적극 수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분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병법에 대해서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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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 붕당으로 나뉘다

​ 박창보

여말선초 건국에 협조한 훈구파는 이후 각종 요직을 장악하지만 정몽주 등 절의를 지킨 사림파는 지방에 은거하며 인재를 양성한다. 오랜 기간 학문을 통한 정치의식을 높여가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각종 치부 행위와 수탈을 비판하고 변혁을 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서로간의 보복행위가 소위 당쟁과 사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파를 대체하며 정권을 장악하게 된 사림파는 이조전랑에 추천된 김효원과 이를 반대한 심의겸과의 갈등이 벌어진다. 동대문에 집이 있던 김효원 세력을 동인이라 하고 서대문에 집이 있던 심의겸 세력을 서인이라 하였다.

​동인은 선조 22년(1589년) 일어난 정여립 사건으로 다시 북인(남명학파)과 남인(퇴계학파)으로 갈리게 되는데 북악에 살던 이발이 처형되면서 안동의 유성룡이 구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이었으나 스승이자 영수인 율곡을 비판하며 집권세력인 동인이 되었다. 이이가 이조전랑 천거를 반대했다는 이유도 있으나 성격이 비슷한 동인 이발과 배짱이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박학하고 재주가 있으나 출세 지상주의자인데다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이를 경계하고 못마땅하게 여긴 선조를 등지고 귀향하였는데 열등감에 변덕스런 왕을 믿고 능력을 발휘하기에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대동계를 결성하고 무예를 연마하는 등 문무겸전의 풍류도를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활쏘기 대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겼다 한다.

​애국심과 개혁사상을 심어주며 마상무예를 비롯하여 각종 무기를 다루었는데 마침내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대동계의 세력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올라왔다. 조사관이 파견되자 죽도에 있던 정여립이 자결을 했거나 피살되었다는 설이 돌았는데 어느 쪽이든 억울한 죽음이었다. 선조의 명으로 서인 정철의 주도하에 기축옥사를 일으켜 과도하게 동인 1천여 명이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마침내 자신도 파직을 당하였다. 동인으로부터 받은 사적인 원한을 지나치게 풀려 한 결과였다.

​만약 정여립이 역모에 휘말려 죽지 않았다면 3년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년) 당시 의병장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였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의병장은 곽재우, 정인홍, 정문부 등 북인이었다.

정여립의 성향으로 보아 이발을 위시하여 정인홍, 최영경 등과 잘 맞았기 때문인데 이들은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 계열의 북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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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도로 들어간 대동(大同)의 물결

​ 김주원

조선 중기, 정여립은 사대 가문에서 태어나고 20대 초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고 학문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영특함을 특별하게 여기던 이이에게 항변하자, 이이는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라고 한탄하였다. 그즈음 서인에서 동인으로 선회를 하자 서인으로부터 변절자로 공격을 받았고, 이이를 지지하던 선조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에 관직에서 사퇴하고 고향 산천 죽도로 들어간다.

​정여립은 혁신적인 사상과 과격한 성격을 지녔기에 죽도에서도 조용히 지내지 않는다. 대동계를 조직하여 양반, 평민, 노예 등을 가리지 않고 활발히 교류하며 그의 사상을 고취시킨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오. 하여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

이런 사상은 당시에 하늘과 같은 임금을 능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인데, 하물며 공공연히 발설하는 것은 모두에게 역성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너무도 앞선 것으로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받는다.

대동계를 조직한 정여립은 매달 정기적 모임을 하면서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고 천반산에서 활쏘기 훈련, 개혁 사상 강론 등을 펼쳤다. 당시에 조선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괴로움을 당하였기에 남언경 같은 관군의 요청을 받아 왜구를 무찌르는 혁혁한 공을 세우며, 대동계의 위세를 확장해 나가던 차에 황해도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런 대동계의 활동을 의심한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 군수 이축, 재령 군수 박충간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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