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09. 매월당 김시습 - 만복사 저포놀이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새로운 역사의 현장을 만들자
불교시대엔 원효대사 있어 당으로부터 우리 민족혼 지켰고 유교시대엔 해동공자 매월당 김시습으로 우리혼불 이어졌다
현대 문화권에서는 해동 메시아 출현하여 역사 이정표 내고 꺼져가는 민족정신 일깨워 내어 우리의 얼을 지켜내야 한다
외침에 의한 문화 침탈로 민족의 반만년 역사는 왜곡 되었고 역사 치매와 수입종교로 인한 민족사상은 통으로 편집되었다
생명의 구심점인 역사인물도 없이 급조 화된 민주화 뜨락에서 민족의식의 상실 속에 사리사욕 앞세운 시대정신만 난무하다
조상님들 사람다운 사람되고 애국자 되라고 회초리 들었으나 현대 부모들은 너 잘 되라며 회초리 대신 물량 공세만 한다
나라를 위한 재목 인류를 위한 훌륭한 역사 인물을 길러내고 투철한 민족의식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역사의 현장을 만들자
신라 진흥왕은 궁궐보다 더 큰 궁궐을 지어 황룡사로 고치고 민족의 염원을 담아 구국애민의 청소년 수련원으로 제공했다
왕권유지나 교육이 아닌 삼국통일과 자유 평등 평화를 위해 호국 수련장을 궁궐보다 더 크게 만든 위대한 교육대왕이다
화랑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에 의해 민족의 숙원인 삼국통일과 세속오계 펼치는데 공헌하며 민족혼불은 당당한 꽃을 피웠다
화랑 풍류도는 우리민족 인성교육 처세술로 모자람이 없기에 구심점이 될 역사 인물을 부활시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자
▲ 매월당 김시습
김시습은 충순위를 지낸 아버지 일성日省과 어머니 울진 선자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두뇌가 탁월해 신동이라 불렸으며 세종으로부터 장래를 약속받았다. 13세까지 당시 이름이 알려진 유학자들 밑에서 수학했다.
15세 때 어머니 별세, 아버지 병환과 계모, 과거 실패 등의 가정적 불운과 결혼생활까지 순탄하지 못했다. 삼각산에서 공부를 하던 21세 때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승려의 모습으로 10년간 방황하기도 했다. 31세 때 경주로 내려가 6년간 금오산에서 살다가 이후 10여년은 서울 주변에서 방랑의 생활을 이어갔다. 47세에 재혼했으나 사별하고 방황생활을 계속하다가 59세 때 충청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금오신화는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등 5편이 남아있다.
▲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의미는 무엇일까
김주원
전라도 남원에 사는 노총각 양생이 부모를 일찍 여의고 만복사 동쪽에서 살았다. 매년 3월 24일에 만복사에서 등불을 밝히며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다.
외로이 살던 양생은 만복사를 찾아 부처와 저포 놀이를 해서 자신이 이기면 좋은 배필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결과는 양생의 승리다. 불전 뒤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젊은 여인이 들어와 양생을 반기며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는데, 기물이나 차림새가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시를 주고받으며 사흘 동안 머물렀다. 여인은 이웃 여인들을 초대하며 간단한 잔치를 베풀며 양생에게 이별의 시간을 되었다고 말한다. 몹시 아쉬워하는 양생에게 여인은 은그릇을 주며 절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한다. 여인이 가르쳐 준 길에서 은그릇을 들고 있으니 마침 지나가던 여인의 부모가 양생을 보고 자초지종을 말해준다. 부모를 통해 여인은 왜구의 난리 때 죽은 딸의 혼령임을 알게 되었다. 여인의 부모는 양생에게 고마워하며 재산을 물려주는데 양생은 모두 팔아 여인의 명복을 빌어주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이가 없다.
어떻게 천하를 손바닥 안에 놓고 보시는 부처께서 시골 사람 양생에게 저포 놀이를 졌을까?
양생이 부처와 저포놀이 내기를 하였다지만 혼자서 한 번은 양생이로, 한 번은 부처로 역할을 바꿔하며 내기를 하였으니 처음부터 본인에게 유리한 내기를 한 것이다.
양생은 이승 사람이고, 여인은 저승 영혼으로 사랑은 생사를 초월한다는 사상이 담겨 있고, 만복사라는 절을 공간적 배경으로 부처에게 소원을 빌어 명문가 출신의 규수를 만나는 윤회 사상을 담았다. 좀 더 시대적인 상황을 조명하며 말해본다.
작가 김시습이 처한 불우하고 기구했던 자신의 처지를 양생의 삶에 투영하였다. 여인이 목숨을 잃으면서 정조貞操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반발하고 단종에 충성을 바치려 했던 김시습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양생과 여인의 생사를 초월한 사랑은 부당한 세상의 횡포에 맞서고 이를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작가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더불어 이 소설의 발전 과정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해서 설화문학 이후 창작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리포터’보다 훨씬 빠른 판타지 소설이 아닐까?
▲ 깨달음으로 가는 길
박창보
율곡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난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 중 하나로 장원만 9번을 할 정도였다.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후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삶에 대한 허무와 절망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불가에 의탁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함께 생활하던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할 정도로 불법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거의 반평생을 불자로 떠돈 김시습을 자신과 비슷한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 같다. 후일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뛰어난 학문에도 불구하고 입산수도의 경력은 두고두고 정적들의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선조의 명을 받아 김시습전을 쓸 정도였으며 스스로 전신이 김시습이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은 강릉에 연고가 있었고 신동이라 불린 점도 같았으며 생육신으로서의 기개와 절조를 흠모하여 이이는 일생의 100세 스승으로 삼았다.
그의 이름은 논어 학이 편의 한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따왔다. 5세 때 세종으로부터 인정받고 열심히 공부하던 중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치렀다. 이어서 외조모가 별세하고 계모마저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혼인은 하였으나 원만치 못했다.
과거에 낙방 후 수양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사흘을 통곡하다 책을 불사르고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었다. 근본은 유교였으나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불교와 선가를 포용하였다.
그의 기행은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수습하지 못했던 사육신의 시신을 모아 노량진에 묻을 만큼 다채로웠다. 전국을 유랑하며 역사의 흔적을 찾고 한민족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시와 글을 지었다.
그중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고조선의 역사를 빌려 쓴 역사소설이다.
세조가 죽고 벼슬을 지내거나 성종 시기에 잠시 환속하였지만 폐비윤씨 사건에 자극받아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59세의 나이로 병사하기까지 세상 사람들은 괴팍한 광인으로 치부하기도 하였으나 배우고 익힌 학문을 실천에 옮긴 엘리트였다.
김시습과 이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삶에 대한 회의와 번뇌를 풀기 위한 방안으로 불교에 심취한 공통점이 있다. 각기 나름대로 깨달음을 위해 자신만의 방식대로 삶을 영위하였으니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 역시 정해진 것은 없을 것이다.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막론하고 깨달음의 영역이란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감정과 번뇌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서 출발하여 어떤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이다.
특히 불가에서의 깨달음이란 진리와 고통,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괴로움의 12가지 원인을 통해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한순간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뜻하는 돈오돈수나 깨닫기는 했어도 더 닦아서 완벽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돈오점수 또한 깨달음과 관련된 개념이다.
몇 종의 바라밀다나 심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심우도의 마지막 10단계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인데 수행자가 깨닫고 나서 결국 중생과 어울려 산다는 것이다.
인간은 나이를 먹어가며 희로애락의 경험을 통해 인생을 깨달아 간다.
결국 인간은 각자가 처한 위치와 환경에서 각자의 방법대로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