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04. 부설거사 - 첫사랑 묘화낭자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알 밖에 있어야 알을 깰 수 있다

​사람은 그릇이 커야 하지만 그릇에 담기고 넘치면 그릇되며 틀은 잘 짜야 하나 한 생각 틀 속에 갇히게 되면 틀린다

그릇은 차면 비우고 틀은 짜되 과감히 깨야 틀리지 않듯 빈 그릇 깬 틀만이 한얼 한생명 빛으로 채우고 담을 수 있다

​암 닭이 알을 스무하루를 품어주면 알에서 병아리가 되고 밖으로 나오려고 졸졸대면 암 닭이 쪼아 깸이 줄탁동시다

천생인연 기다리던 묘화낭자 낭랑18세 벙어리 냉가슴으로 알 밖에 있어 알을 깰 수 있던 부설은 묘화의 꿈을 깼다

​잘못 품으면 곪고 잘못 깨면 죽는다는걸 아는 줄탁현장은 역사 경영에 헛됨 없듯이 부모도 자식 기름에 삿됨 없다

한 치의 삿됨이나 이해에 편승되지 않은 줄탁동시 부설묘화 겹겹이 쌓인 천생인연으로 껍질 벗고 알에서 깨어 나왔다

​지평선 밖이 땅이고 수평선 밖이 물이기에 평선을 넘어라 공평선 밖의 공空을 볼 줄 알아 시차 공차 안목 키우자

부설의 수행은 병만 깨고 물만 허공에 떠 있게 하는 경지로 공평선 밖으로 나와 본심본태양 빔(空)으로 대도 이루었다

​자연과 공생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동굴문화 특징 생기듯 얼이 드나드는 얼굴로 동굴 속 신조 인면조 날개 내었다

동굴 안에서 스무하루 만에 사람 되었다는 전설의미 알아 철모르는 철부지가 아니라 철 따라 사는 철든 사람 되자

​​

▲ 구무원의 역사적 만남

​ 신동만

부설(浮雪)이 영희(靈熙), 영조(靈照)와 함께 변산의 한 암자에서 수행하다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순례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가는 도중 김제 만경들판 두릉(杜陵) 마을의 구무원(仇無寃)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두릉마을은 현재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다.

​구무원에게는 무남독녀 묘화(妙花)라는 예쁜 딸이 있었는데 나면서부터 벙어리였다. 18살의 묘화가 부설의 원력으로 말문이 열렸다. 이후 묘화는 부설을 사모하며 부부의 연을 맺기를 간절히 청하니 부설은 승려의 본분을 핑계로 거절하자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에 고심 끝에 묘화와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았다. 그들이 살았던 곳은 두릉마을에서 약 십 리쯤 떨어진 고현마을로 현재 성덕면 남포리로 추정된다. 슬하에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다. 부설은 농사를 지을 때도 화두에 집중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별당을 지어 수도에 전념하였다. 묘화부인과 15년을 살다가 두 아이를 맡기고 변산의 쌍선봉(雙仙峰) (498m)에 암자를 짓고 본격적인 수행생활을 시작했다.

5년 동안 두문불출 수행을 정진하다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오대산에서 내려온 영희, 영조와 해후하여 그간의 수행을 시험하였다.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담아 걸어 놓고 각자 하나씩 막대기로 쳤다. 영희와 영조의 병은 깨어지고 물이 흘러 내렸지만 부설의 병은 병만 깨지고 물은 공중에 그대로 떠 있었다. 출가 수행자보다 속세에 남아 수행한 부설의 내공이 더 큼을 보여줬다. 부설은 참된 법신(法身)에는 생사가 없다는 설법을 한 뒤 입적했다.

입적(入寂) 후 시신은 영희와 영조가 다비(茶毘)하여 사리를 변산 묘적봉 남쪽에 안치하였다. 묘화부인과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은 출가하여 부설의 뒤를 이었다. 변산의 월명암(月明庵)은 부설과 그의 딸 월명의 수행처로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암자다. 아들 등운도 훗날 유명한 조사(祖師)가 되었다. 묘화부인은 110세에 열반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전법제자인 영허해일(映虛海一)이 남긴 부설전(浮雪傳)에 의하면 부설은 변산에 자신의 수행처 부설암, 부인을 위해 묘적암, 아들 수행처 등운암, 딸의 기도처 월명암을 지었다. 평생 수행만 했던 부설이 경제적 능력이 있어 이 엄청난 불사를 할 리 만무하다. 이는 분명 그의 장인 구무원의 몫이다.

구무원은 만경평야에 대토지를 소유한 백제의 지방 호족으로 단군네이었을 것이다.

▲ 세계 3대 거사 부설 세속에서 도를 닦다

​​ 김대식

불교 전통에서 재가불자로 도를 깨친 거사로서는 단연 유마, 부설, 방 거사가 있다. 부설과 방거사는 실존했고, 유마는 대승大乘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경전 속에 구체화 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진다.

유마경은 유마를 부처님 시대를 살아간 재가불자로 그리고 있다. 경의 주인공으로, 비록 거사지만, 부처님의 직계수제자인 10대 제자, 출가승을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준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성문聲聞의 방식으로는 불법을 깨우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지혜의 제일로 알려진 문수사리와 유마간의 불이법문不二法門 대화에서 유마가 침묵으로 답하는 대목이 유명하다. 그는 소승을 극복하고 대승으로 나가는 초입에서 사자후를 발한 거사다.

​부설거사는 신라인으로 삼국통일 전후를 살았다. 부안에 월명암을 창건했다. 만경뜰 어느 마을에서 묘화여인을 만났다. 파계하고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얻었다. 거사가 된 것이다. 치열한 구도 끝에, 돌로 친 병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은 경지까지 이르렀다.

도력이 출가승 도반인 영희, 영조를 능가한 것이다. 대승은 바로 성속 구분 없이 어디서나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본다. 누구에게나 희망을 주고, 대중에게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폭을 지닌다. 원효도 나중에 거사가 된 셈이다.

​방 거사는 당대唐代 사람으로, 유명한 마조 대사에게 참학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동정호에 버리고, 부인과 아들과 딸과 함께 불법에 귀의하였다. 가족 모두가 깨달음을 얻었다. 방 거사가 남긴 어록은 불법의 깊이로 오늘날까지도 불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유마경에 의하면, 대승운동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을 추적해보면, 주로 기원 전후시기에 새로운 변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전개되었다.

대승은 불교 사상의 발전과 진화의 산물이다. 개인의 해탈을 넘어 타인 해탈도 목표로 하고, 불이중도不二中道가 주창되고, 특히 수행修行 불요不要라는 획기적인 발상은 소승 시대에선 찾기 어려운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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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설 삶의 터닝 포인트

​ 김주원

부설과 영희, 영조는 넓은 호남평야를 걷다가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만난다. 농사를 짓기에 다소 쌀쌀한 날씨, 허허로운 김제 벌판에서 묘라리 마을을 찾아 들어간다. 마침 툇마루에서 비 내리는 벌판을 내다보던 두릉杜陵의 구무원이 서둘러 대문을 열고 나가 세 명의 스님을 집으로 맞아들였다. ​부설과 김제 묘라리에 사는 구무원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탐방 팀이 이곳을 방문하던 날도 비가 내렸었다.

김제에 도착했을 당시에 봄비가 몇 날 며칠을 이어서 내리니 독실한 불교 신자인 구무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고, 이에 보답하기 위하여 법문을 설파했다.​

나면서부터 벙어리인 구무원의 딸 묘화가 부설의 법문에서 큰 감동을 받고, 태어나 십수년 만에 말문을 열었다. 말문이 터진 묘화가 벙어리로 살았던 업장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는지 눈물을 흘리며 부설을 향하여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세에 걸친 삼세 인연이 있으므로 부부인연이 맺어지지 않으면 죽기를 각오할 것이며, 인과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입니다.’라고 말하니 집안사람 모두 놀랐다.

몇 날을 애원하던 구무원과 묘화에게 부설이 드디어 ‘부처님의 뜻은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에 있습니다.’라고 승낙을 하게 된다.

이에 부설은 영희, 영조 두 도반에게 ‘부디 도를 이뤄 자신을 가르쳐 줄 것’을 당부했다.

두 도반이 오대산을 향하여 떠나자 부설과 묘화는 ‘부설 마을(현재 김제 성덕면 성덕리)’에 신혼집을 정하였다.

​이곳은 눈이 오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며 땅에 눈이 떨어지지 않는 동네라고 해서 부설浮雪의 이름을 지어 스스로 거사가 되었다.

​등운과 월명 남매를 낳아 15년을 살다가 만경 바닷가에 초막(현재 망해사 부근)을 지어 수행 정진을 이어가게 되었다.

부설은 묘화와 가정을 이룸은 만물을 포용하는 중생 제도의 대승적 실천이고, 구원의 도를 추구하는 것은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불교의 세계 3대 거사의 삶을 완성하게 된다.

눈발이 휘날리는 날에 김제 ‘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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