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03. 원효대사 - 개암사에서 정진 수행

김현종 · 2026-05-27 · 자유

각설이(覺說伊)로 꺼져가는 민족혼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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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배달민족 백제 고구려는 역사 무대에서 내려오고 대조영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며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당의 안동 웅진 계림도독부 설치로 진정한 통일은 없었고 남쪽에는 신라 북쪽엔 발해가 있는 남북국 시대만 있었다

​당은 고구려 백제 신라 영토에 도독(호)부 통치를 하였고 원효는 스스로 국경선이 되겠다며 서원의 깃발을 들었다

각설 따르던 대중들 100여개의 사찰을 창건 중창 불사로 원효 사후 추종하던 서당 9서당 군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원효 100주기 맞아 고선사 기념비 건립시 손자 설중업은 스스로 서당 자초했으니 서당 화상비(誓幢和尙碑)라 했다

원효는 승려인가 민족 각설이 서당인가 따질 때가 되었고 역사는 원효를 승려로만 부르기엔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

​스스로 삭발 후 승려가 된 원효는 자장가 유래가 될 만큼 호국신앙 열어준 아비지의 황룡사 9층탑에 마음을 담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깨달아 당 유학 대신 민중불교로 서당 각설이가 되고 중국불교에 맞서 해동불교 앞장섰다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전설을 만들고 금강 삼매경론으로 중국 불교계 성사로 추존되며 호국불교 창건을 주도했다

중앙탑 각설이들 지신밟기로 얼씨와 절씨를 심어 놓았고 각설이들 죽지 않고 살아나 꺼져가는 민족불씨 살려냈다

​원효는 백고좌(百高座) 초청을 받지 못한 후 왕후를 위한 황룡사(黃龍寺) 단독 법좌 강론에 “옛날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대들보를 가로 지름에 있어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가 있겠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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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국보고서 사자후 (獅子吼)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 617년에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나 15세 때 출가하여 수도정진,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는 학자이자 사상가로, 일반 대중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한 민중 교화 승으로 알려져 있다.

34세 때 중국 유학길에 올라 요동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다시 10년 뒤 의상 대사를 따라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으나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거침없는 삶을 살았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대혜도경종요, 금강반야경소, 화엄경소 등을 저술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한 유학길에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중도에 유학을 포기한다.

신라에 돌아와 귀국보고서를 조정에 보냈는데 이 보고서는 훗날 사자후(獅子吼)가 되었다.

​원효대사의 사자후는 명문이다.

660년대 당나라에 의해 무너져가는 우리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태종무열왕과 조정을 향해 부르짖은 절규이자 고구려 백제 신라 유민들을 위하여 희망을 품은 외침이었다.

자루 없는 ‘도끼’는 당나라에 대항해 힘을 쓸 수 없는 권력이다. ‘자루’는 지혜로서 무너지는 민족혼을 다시 세우겠다는 원효의 의지다.

‘하늘을 받친 기둥’은 세상을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도의 질서이며 우리 민족의 기백이요 혼이다. 원효는 낡은 질서의 틀을 깨고 새로운 정신문화를 창조하고자 하는 역사의식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다.

왕과 대신들은 ‘자루 없는 도끼’는 원효가 파계하여 결혼하고 싶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합방을 하게 하는 계략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찌 해석하든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이에서 물총으로 설총을 얻었다. 설총은 이두로 나라의 언어를 정비하였으니 사자후를 실천한 샘이 되었다. 또한 팔도에 각설이를 전파하며 대중 불교의 성현으로서 나라를 구하고자 대중 속에서 수도정진 하였으니 이 또한 지천주(支天柱)를 만들었음이다.

원효는 676년 개암사 뒷산 울금바위 굴에 머물며 암자를 중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여 그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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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우침은 무엇인가

​ 신동만

원효는 의상과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어느 날 비가 오고 어둠이 내리자 비를 피하려 바위굴에 들어갔다가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 잠결에 심한 갈증을 느껴 주위를 더듬다가 물이 담긴 바가지가 손에 잡혔다. 단숨에 마시니 꿀맛같이 달고 시원하여 갈증이 해소되었다. 다시 깊은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간밤에 마신 꿀맛 같은 물이 생각나 찾아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지난밤 잠을 잔 곳은 동굴이 아니라 무덤 속이었던 것이다. 꿀맛 같았던 물이 썩은 해골 물이라 확인되니 구역질이 나고 모든 것을 다 토해내도 메스꺼움이 가시질 않았다. 서둘러 무덤을 나와 당나라로 향해 길을 재촉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어제 마신 물은 달았는데 아침에 보니 해골 물이었다. 물이 하루 사이에 변할 리는 없는 것이고 변한 것은 내 마음이다.

결국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이구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라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결국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되돌아갔다.

​이후 수많은 저서를 통해 식자층을 계도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를 가르쳐 불교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요석공주와 사랑하여 설총을 낳고,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패망한 백제 유민들을 위무하는 등 원효의 행적은 거침이 없었다.

​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특별한 스승이 없이 오직 경전을 연구와 수행으로 득도하여 한국 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100여부 240권의 저술을 통해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爭思想), 무애사상(無㝵思想)을 설파하여 중국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세계적인 대학자요 사상가가 되었다.

▲ 의상대사의 동행

​ 김대식

우리는 전북에 녹아있는 원효와 의상, 부설의 맥을 따라 탐방 길에 올랐다.

때는 마침 2023년 석탄일. 개암사와 인근 유적 탐방에 이어, 그날 밤을 월명암에서 묶게 되었다. 월명암은 부설이 창건한 호남 3대 영지다. 삼국시대의 진표와 같은 고승 대덕에서, 조선조의 진묵, 근세의 용성, 행암, 학명, 해안, 고암, 탄허, 혜암 등에 이르기까지 수 없는 도인들이 머물던 으뜸 도량이다.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많은 스님들이 월명암에서의 정진을 선망케 한다. 이번은 원효대사를 만나는 편이다.

변산의 개암사 뒤편 두 개의 암봉인 울금바위 중턱에는 원효의 방 있고, 월명암 앞쪽 멀리에는 의상봉이 위치 해있다. 주제를 두 분으로부터 전개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원효를 말할 때 의상이 빠지면, 춘향이 옆에서 몽룡이 사라져버린 느낌을 주기도 한다. 원효는 스스로 지은 법명이다. 자신이 한국불교의 새벽을 열어 우뚝 서리라는 것을 예견한 것이었을까?

그는 당나라 유학길 중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 과부 요석공주와의 파계와 아들 설총, ‘무애가’로 민중을 파고든 대중교화 이력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반관심이 언뜻 원효의 기행과 무애행에 가지만, 그의 삶의 치열성은 남긴 저술들이 보여준다. 현존은 20부 22권이다. 실제는 100여 종 240여 권을 지었다. 그의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 별기’는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에서도 최고로 받고 있다.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으로 대변되는 그의 사상은 과연 한국불교계의 금자탑이다.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모양부터가 오늘날 메모리칩과 비슷하다. 부처님께서 득도 후 우주 원리를 즉설 했다는 화엄경. 그 방대한 양을 210자로 축약했다.

대단한 안목이다. 그는 당나라 유학과 화엄경 공부, 유학 시절 ‘선묘’ 낭자와의 만남과 영주 부석사 창건, 통일 후 당나라와의 갈등 속에서 조국 신라를 지키기 위한 행동, 관음 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낙산사 창건 등으로 유명하다.

전국 유명 불교사찰에 가면 자주 두 분의 유적을 접하게 된다. 그만큼 족적이 큰 것이다. 가는 길은 서로 달랐다. 의상은 국가 제도와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원효는 기존의 틀에 매이지 않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민중의 교화를 이끌었다. 역할과 인연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씨줄과 날줄로 한국불교의 토대가 되었다.

쌍벽으로, 우리 사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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