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02. 백제 무왕 - 선화 공주에 반하다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익산 왕궁에서 천년의 꿈을 그리다
국기國旗는 그 나라의 위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얼굴이요 국가國歌는 그 나라의 역사와 감성을 표출해내는 감성이다
국화國花는 그 나라의 문화를 나타내는 아름다움의 맵씨요 국조國鳥는 그 나라의 시공을 공유하는 생명체의 상징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인물은 세종대왕 을지문덕 이순신이고 백제의 상징 인물은 왕인박사 선화공주 무왕 계백장군이다
우리가 곧 나라인 우리 겨레의 호국정신은 매우 투철하였고 강토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의사 열사 투사 되었다
단군네 남하 때 같이 와서 까치라 부르며 까막까치라 했고 유라시아 텃새 까막까치는 조상님과 공생했던 민족 텃새다
백제는 농어촌 두레 문화로 자연 경영의 공동체 문화 내고 우물은 둘레둘레 두레박으로 떠 올려서 나눠 먹고 살았다
철을 알고 철에 맞는 기후를 활용하며 농사지어야 했었기에 절기 변화에 따라 빨리빨리 서둘러 대응하는 습관 필요했다
철 따라 매사에 빠르고 신속정확 해결하는 빨리빨리 문화로 세상만사 시기가 중요함을 알았기에 자연 대응력 요구된다
우리는 둘레둘레 살피며 제때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찾아내 옹기종기 함께 모여 두레질 함께 먹는 두레 밥상 내놓았다
두레 문화는 농어촌 공동체 정신으로 계승하며 발전되었고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의병되어 자발적 국경수비대 되었다
▲ 미륵산 사자암에서 품은 백제 왕궁 터
김주원
지금은 절터로만 남아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백제 미륵사지. 신라 황룡사와 여러모로 쌍벽을 이루는 미륵사지는 고구려 정릉사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사를 품은 미륵산의 매력을 찾기 위해 오른다. 봉우리가 사자를 닮아 사자봉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사라진 절터의 흔적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지역불교 문호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사자암으로 오르는 길 옆으로 대나무 숲, 기도 수양처로 쓰일 법한 바위동굴을 보며 얼마쯤 올랐을까,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수호하듯 우뚝 서 있는 사자암에 도착했다. 가벼이 산책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는데 내려다보이는 조망은 산 정상에 오른 듯 장쾌하다. 동서남북으로 확 트인 호남평야의 넓은 벌판을 보니 말을 달려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고픈 생각이 든다. 사자암에서 수양하는 스님은 아래 너른 세상의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사자암에서 동남쪽에 백제 왕궁 터가 보인다. 백제 무왕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신라초기에 사찰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왕궁 터에서는 왕궁유적과 사찰유적이 다수 발굴되는 곳이다. 지금은 오층석탑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제 멸망 후 1400여년을 한결 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층석탑의 고상함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찬란한 햇빛의 기운과 너른 평야의 온유한 바람결로 완성된 오층석탑의 곡선,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 백제의 숨결이 전해지는 듯하다. 화려하고 융성했던 백제 무왕 시절의 건축물은 사라지고 너무도 외로이 홀로 그 넓은 왕궁 터를 지키고 있는 오층석탑! 부드러움 속에서 강인함이 전해져온다.
이 땅을 지켜내는 후손에게 전해주고픈 의미는 무엇일까? 오랜 풍파에도 그 자리에서 지탱하고 있는 뜻이 분명코 있으리라. 먼 옛날의 융성했던 백제의 영화를 꿈꾸고 있으리라.
▲ 백제의 부흥군주 무왕
박창보
부여장은 백제 30대 왕의 이름이며 시호는 무왕이다.
무(武)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정복군주로서의 전공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재위 기간 42년(600년~641년) 내내 신라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크고 작은 전투를 10여 차례 이상 치렀다.
국방 강화를 위해 접경 지역에 여러 성 들을 쌓거나 왕권 강화를 위해 궁궐을 크게 중수하였다. 또한 왕흥사, 미륵사, 제석사 등 사찰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와 당, 왜와 화친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45년간 집권했던 27대 위덕왕과 동생 28대 혜왕, 혜왕의 아들 29대 법왕 등이 각기 부왕일 것으로 보았다. 혜왕과 법왕은 불과 1년 남짓 왕위에 있다 죽었으므로 왕권은 약화 되었고 귀족 간 내분으로 내외 정세는 어렵게 되었다.
어려서 서동이라 불렸으며 출생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에서 마를 캐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다. 연못가에서 살았던 어머니가 흑룡과 연을 맺어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아마도 왕이나 왕족의 서자 출신일 것이다. 효성이 지극한 데다 풍채가 매우 좋고 뛰어난 재주와 용기가 있었다. 품은 뜻과 기상 또한 호방하고 걸출했다고 한다. 신라의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소문을 내게 하였다. 결국 공주를 궁에서 쫓겨나게 함으로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소위 가짜뉴스의 선구자인 셈이다. 혼인 후 수많은 금으로 장인인 진평왕의 환심을 사고 비로소 사위로 인정받지 않았을까?
마동은 그만큼 영특하고 남다른 지략이 있었을 것이다.
2009년 초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금동사리함에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가 석탑을 준공하였다는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서동요는 허구라는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무왕의 첫사랑은 선화공주였으며 의자왕을 낳았고 후비는 사택왕후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렵게 오른 왕권 강화를 위해 8대 대성 중 하나인 사택 씨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 시대에 확장한 영토를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진평왕은 53년의 재위 기간(579년~632년)중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다. 무왕의 신라에 대한 끊임없는 공략은 수가 망하고 들어선 당나라와 신라와의 연맹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의자왕(641년~660년)대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다.
해동증자라 불리며 부왕의 위업을 이으려 했던 의자왕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불러왔다. 내부의 갈등과 배신은 마침내 웅진성주 예식진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 소정방에 바침으로서 끝이 났다. 이후 백제 부흥군과 야마토 왜의 참전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한중일 국제전인 백강전투에서 참패함으로서 무왕의 꿈과 업적은 산산조각이 난 셈이다.
무왕이 재위 후반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금마로 천도를 획책하였으나 결국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오늘날의 익산왕궁리 유적이다. 쓸쓸한 성터와 오층석탑이 웅장한 규모를 대변하고 있다. 무왕 사후 미륵사 인근의 쌍릉에 모셔졌는데 대왕릉은 무왕,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 미륵사, 왕궁을 익산에 창건하다
신동만
백제百濟는 부여족夫餘族이 남하하여 마한의 맹주 목지국으로부터 한강 유역을 물려받아 나라를 일으켰다. 고이왕, 근초고왕, 무령왕 때 전성기를 이루며 중국의 요서遼西, 진평鎭平, 산동山東, 하남河南, 절강浙江 등과 일본의 규슈九州, 오사카大阪, 나라奈羅 일대 및 동남아東南亞의 일부지역에 22담로국을 경영한 해양제국海洋帝國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기습으로 개로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가 서문 밖으로 탈출하는 도중 붙잡혀 아차산성에서 참수 당했다. 갑작스런 고구려의 남침으로 그동안 준비했던 충주忠州로의 왕성 이전을 실행하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은 웅진성熊津城 (공주)으로 급하게 천도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외침은 더욱 거세지고 귀족층의 권력 다툼으로 수차례 왕이 시해되고 반란으로 국력이 쇠퇴해졌다. 난국을 수습한 무령왕이 국력을 회복하고 아들 성왕은 도읍을 사비성泗沘城(부여)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칭했다. 성왕을 이어 장남 위덕왕과 차남 혜왕이 차례로 왕위를 잇고 혜왕의 장남이 법왕으로 무왕의 아버지다. 무왕(武王 600~641)은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아름다운 사랑노래 서동요의 주인공이다. 그는 풍채가 우람하고 머리가 영민했으며 기상이 호방하였다. 그에겐 비대해진 귀족층의 권력을 분산하고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며 융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