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01.고조선 준왕 - 내가 한(韓)왕이다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준왕의 천명 '내가 한(韓)왕이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홍익의 뜻을 품고 신단수 아래 신시 내고 곰네와 범네는 사람되려고 굴속에 들어가 쑥과 마늘만 먹었다

백일치성 기도하다 곰네만 남아 스무하루 만에 웅녀로 화현하고 환웅과 사이에서 아들 낳으시니 민족 시조인 단군왕검이시다

​환인은 하늘의 조화 환웅은 땅의 교화 단군은 인간의 치화로 천지인 삼합정신 천부경 경전 내어 366사로 세상을 경영했다

사람이 태어나면 스무하루 동안 금줄로 단군 후예임을 알렸고 만나면 곰네들을 서로 알아 곰 왔다며 곰 많습니다 인사했다

​자연을 경영함에 있어 치우침과 어긋남이 없는 해를 닮았기에 일은 해라(DO)하고 해모수 해부루 부르며 아사달문화 열었다

마음씨로 말씨 글씨 솜씨 맵씨 다듬어 혼불 밝혀 불씨 만들고 조상 단지에 자유 평등 평화의 홍익을 담아 역사를 지켜왔다

​단군조선 천이백여 년 기자조선 천여 년으로 명맥 이었으나 BC 194년 위만의 무력으로 준왕은 단군네와 함께 남하했다

뱃길로 한지韓地인 금마에 이르러 스스로 한 왕이라 칭하니 중국의 한漢이 아닌 한韓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선포했다

​준왕의 남하로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시대는 막이 오르고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4국, 다시 3국 시대 열렸다

한이라 함은 바로 우리가 단군 후예임을 만천하에 천명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로 세상 이치를 밝혔다

▲ 익산으로 내려온 고조선 준왕

​ 박창보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다양한 시각과 학설이 있다. 문헌으로는 상서대전과 사기에 기자의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동이족인 은나라 멸망 후 주나라 무왕에 의해 조선후로 봉해졌지만 신하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자가 종선왕거從先王居 하였을지언정 망명객이 세력도 없이 광활한 조선을 이어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동족인 기자에게 요하 서쪽 고죽국이 있던 난하 모퉁이, 또는 대능하 인근을 내주고 장당경과 아사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여 등 여러 나라가 조선을 계승한다. 기자는 작은 지역에 웅거하다 점차 세력을 형성하여 이어 갔다. 후대에 연장燕將진개의 침입으로 강역이 크게 축소되었다가 회복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단군 40대 기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속아 밀려났으며 후사 없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는 준왕이 연의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를 건너 한지韓地에 거처하며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BC 194년의 일이다. 후한서에는 준왕이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쳐 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위략과 잠부론에서 한후가 해중海中으로 옮겼다고 했고 박물지에서는 바다로 들어가 선국鮮國이 되었다고 하였다. 준왕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언급조차 없다. 다만 중국衆國과 진국辰國이 한漢과 통교를 희망하였으나 위만이 가로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기록만 있다.

​한지나 해중, 선국이 어디인지 자세히 설명하는 곳은 없으나 고려후기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최초로 금마에 비정하였다. 조선시대에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동사강목, 동국통감,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역고, 금마지 등의 기록도 같다. 일명 기준성이라 불리는 익산 미륵산의 미륵 산성(용화 산성)은 발굴 결과 백제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이전 마한세력권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삼국 시대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준왕이 전투가 벌어지고 급히 망명하다 보니 그리 많지 않은 세력이 육지를 통해 멀리 한반도로 이동하기보다 배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선박과 항해술로 보았을 때 연안을 따라 항해하다 서해안의 적당한 곳에 상륙하였을 것이다.

​군산 나포까지 배로 이동 후에 내륙으로 향하였다는데 세 아들의 태를 묻었다는 익산 태봉산 태봉사에 준왕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준왕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일부 족보에 기 씨를 비롯하여 한씨, 선우 씨로 바꾼 성도 있다. 평양 숭인전비의 내용도 같다. 아마도 직계후손은 아닌 혈연적 준왕 제사 집단일 것이다. 낙랑 한 씨와 낙랑 왕 씨의 기자 후손 설 또한 유력한 세력으로서의 조선 유민으로 보인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후손이 끊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진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준왕이 일본에 귀화한 마전련麻田連의 시조로 보기도 하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어 보인다.

​진국의 세력과 기존 토착민, 조선유민, 진지망인들이 얽혀 수십 개의 군소 집단이 세력 다툼을 하였으니 준왕이 언제 어디서 소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한지에 이르러 마한을 개국하였다고 하였고 금마설과 여러 족보의 기록으로 보아 일정 기간 잔존 세력이 존속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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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유부벽정기’ 기자 조선의 역사가

​ 김주원

송도의 부호 아들로 자라난 홍생이 평양의 영명사 부벽루에 올라 나라를 걱정하며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진지하다. 또한, 이 소리를 듣고 나타난 천상의 선녀는 은왕의 후예인 기자 왕의 딸이라 하니 글로써 위대한 역사와 자신의 슬픔을 남기고자 했던 김시습의 유혹을 따라 ‘취유부벽정기’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영명심승永明尋僧과 부벽완월浮碧玩月은 평양 팔경에 속하는데 영명사 부벽루와 관련되어 뛰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술과 경치에 취한다면 누구라도 시인이 될듯하다.

​홍생은 취흥을 이기지 못해 영명사 부벽루에 올라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며 시를 지어 노래하다 삼경이 되어 돌아가려는 데 때마침 좌우에 시녀를 거느린 선녀가 나타나 밤이 새도록 선녀와 아름다운 시를 지어 이야기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선녀의 말인 즉 자신은 기자 왕의 딸로 부왕이 위만 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많은 고초를 겪던 중에 선조께서 내린 불사약을 먹고 수정궁의 상아가 되었다고 소개한다.

​홍생이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오래전 망한 고조선의 후손 선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내용을 소설 속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찬탈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고, 고조선의 후손 선녀를 등장시켜 사랑하는 것은 폐위된 단종을 그리워하며 나라 잃은 슬픔으로 비유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금오신화 ‘취유부벽정기’를 통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 조선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단군 조선이 쇄락 해지자 은왕의 후예 기 씨가 동쪽으로 내려와 기자 조선을 만들어 기원전 1122년에서 기원전 195년까지 거의 천년의 역사가 지속 되었고, 위만 조선(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에 의해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자 동래설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에서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거나, 고려 시대에 불교가 통치 이념으로 굳어지며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함께 기자가 국조로 나란히 숭상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 바라보는 시각이 사뭇 다르다. 한민족 최초의 나라 배달국을 계승한 단군 조선의 상고사를 중국과 일본에서 왜곡 날조했다고 주장한다. 즉 동북아를 지배한 황제의 나라 단군왕검의 고조선 역사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가짜 역사를 엮었다는 사관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한국사 체계는 ‘환국 > 배달 > 단군조선 > 북부여 >고구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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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남천南天 과 동진東進

​ 신동만

단군 조선은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 체계로 중앙에 진조선辰朝鮮이 우현에 번조선 좌현에 막조선으로 나누에 통치했다. 따라서 요서 지역에 번조선이 있었고 기자가 단군이었기 때문에 기자 조선이라고도 했다. 준왕은 번조선의 단군이었다.

​기원전 2세기 전후 혼란한 중국 대륙에서 이주민들이 기자 조선의 서쪽 국경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자 조선의 준왕은 이주민 위만을 중심으로 정착을 허락하고 변경의 방위책임까지 맡겼다. 그러나 이주민이 계속 늘어나고 세력이 커진 위만은 은혜를 배신하고 군사를 일으켜 준왕을 몰아냈다. 준왕이 밀려났다고 단군 조선 자체가 패망한 것은 아니다. 단군 조선의 실제적인 패권은 진 조선에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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