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13)독립문·서대문형무소 탐방기
김현종 · 2026-05-27 · 자유
독립의 문에서 감옥의 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되새긴 자유의 값
독립문, 자주를 향한 돌문이 열리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 언덕에 우뚝 선 독립문(獨立門) 은, 근대 조선이 세계 앞에 내건 첫 자주선언이었다. 1896년 착공되어 1897년 완공되었다. 전라도 보성 출신 개화사상가 서재필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한다’ 는 뜻으로 독립문 건립을 제안했다.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국민 모금운동을 주도해 전국에서 2,600원이 넘는 성금을 모았다. 독립문이 세워질 자리는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 터였다. 서재필은 조선의 사대외교를 상징하던 그 문을 허물고, 자주독립의 새로운 상징물을 세웠다.
설계는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신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Afanasy Ivanovich Seredin Sabatin) 이 맡았다.
그는 프랑스 개선문을 모델로 하되 조선의 미감을 가미해 화강암 석조 아치형 문으로 설계했다. 높이 14.3m, 폭 11.5m에 달하는 석문은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선을 지녔다.
상단에 새겨진 현판은 서재필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독립문은 상징적 기념물이 아니라, ‘조선은 더 이상 속국이 아니다’라는 시대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잔혹했다. 독립문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조선의 저항을 꺾기 위해 세운 서대문형무소가 자리한다.
자주를 외쳤던 돌문 옆에, 독립 운동가들이 끌려와 고문당한 감옥이 함께 서 있는 풍경은 근대사의 모순을 상징한다.
돌로 세운 독립의 문은 자유를 약속했지만, 그 문을 지나면 철창의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민 계몽의 불씨를 지핀 개화지사들
독립문의 건립은 일반적인 기념사업이 아니라, 조선을 근대 시민사회로 이끌려는 사상의 혁명이었다.
그 중심에는 귀국한 개화사상가 서재필(徐載弼) 이 있었다.
그는 1896년 귀국 직후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 최초의 순 한글 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신문 창간호의 머리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나라 인민이 세상 형세를 알지 못하여 외국의 속임수에 빠지고, 관리가 나라를 위하지 아니하니, 신문을 내어 세상일을 서로 알게 하고 나라의 형편을 깨닫게 하려 한다’그 문장은 곧 조선 사회를 향한 깨어남의 외침이었다.
서재필은 국민이 세상과 나라의 사정을 알아야 진정한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신문을 통해 ‘나라의 근본은 인민이며, 인민이 깨어야 나라가 선다’고 호소했고, ‘백성이 배우지 못하면 나라도 위태롭다’고 경고했다.
그의 글에는 백성이 주체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독립신문은 한글로 발행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었고, 외국 소식과 조선의 현실을 함께 다루며 국민에게 세상을 아는 눈을 열어주었다.
서재필이 이끈 독립협회는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시민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외쳤다.
‘백성이 곧 나라’라는 구호가 처음으로 공개 연설장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곧 조선의 보수 관료층과 외세의 반발을 불러왔다.
서재필은 ‘공화정을 꾀한다’는 누명을 쓰고, 1898년 4월, 고종의 명에 따라 강제 추방되었다.
그의 이름은 조선 땅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신문과 돌문은 오늘날까지 자유와 계몽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서재필이 꿈꾼 독립은 총칼의 독립이 아니라 사상의 독립, 즉 국민이 스스로 깨달아 나라의 주인이 되는 길이었다.
이완용의 배신과 조선의 몰락
작은 도적이 큰 도적이 되다 역사는 때로 인간의 탐욕이 나라의 운명을 뒤집는 순간을 기록한다. 독립문 후원자 명단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李完用)의 이름이 있다.
그는 독립협회 회장을 맡고, 독립문 건립기금으로 100원을 헌금했다.
당시 일반 백성의 한 달 품삯이 1원도 되지 않던 시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헌금은 ‘국가의 자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신’을 위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1892년 전라감찰사로 부임하며 백성의 세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 ‘고종실록’과 ‘독립신문’에는 그가 전라도 일대에서 관리들과 결탁해 2만~5만 냥(현재 약 50억~100억 원) 을 착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부패 관리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부임했지만, 오히려 더 교묘하게 세곡을 갈취했다. 이후 그는 이 돈으로 서울에 대저택을 짓고, 일본 외교관들과 교류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올라섰다. 작은 도적이 백성의 곡식을 훔쳤다면, 훗날 그는 나라를 팔아넘긴 큰 도적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그는 서명자 중 한 명으로 일본에 조선의 외교권을 넘겼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그 공로로 일본 천황은 그에게 훈1등 욱일대수장, 후작(侯爵) 작위와 은사금 15만 엔을 수여했다. 한때 독립문을 위해 헌금했던 손으로, 조선의 국새를 일본에 넘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일본 관보에 ‘병합공신 1등’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백성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이완용 척살’ 격문이 나붙었고, 그는 수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다. 마침내 이재명의사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만다. 그리고 그는 고질병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매국노라는 이름으로 죽는다.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 가 더 중요한 것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은 그를 ‘민족반역자 제1호’ 로 지정했다.
그가 받은 ‘후작’ 작위는, 역사 앞에서 ‘후안무치’라는 낙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역적 이완용의 무덤은 파묘 되었다 한다.
서대문형무소의 기억 민족의 저항, 꺼지지 않은 불꽃 이완용의 서명 이후, 조선은 식민지의 길로 내몰렸다.
1908년, 일본은 조선인의 저항을 감시하고 탄압하기 위해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을 세웠다.
이곳은 일반 죄수들의 교정시설이 아니라,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폭압의 현장이었다.
좁은 독방, 차가운 고문실, 사형장으로 이어지는 복도 등, 모든 구조가 인간의 존엄을 지우기 위한 비참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벽 안에서 오히려 민족의 혼이 되살아났다.
유관순, 신채호, 강우규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도 태극기를 만들어 옥중 만세를 불렀고, 그 외침은 형무소를 울렸다.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은 지금도 그들의 피와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의 제단이었다.
역사는 때로 가장 어두운 공간에서 가장 빛나는 희생을 낳는다.
서대문형무소는 바로 그런 역사의 증거이고 우리는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공간에서 배우는 자유의 가치
광복 후에도 서대문형무소는 한동안 정치범과 민주화운동가들의 수감지로 사용되었다.
독립의 감옥이 다시 민주주의의 감옥이 된 것이다.
1987년 이후, 이곳은 과거를 기억하고 평화를 배우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바뀌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붉은 담장을 따라 걸으며, 과거의 비극 속에서 자유의 가치를 배운다.
독립문에서 형무소까지의 짧은 거리에는 조선의 근대 100년이 압축되어 있다.
서재필이 기획하고 사바틴이 설계한 자주의 문, 이완용이 더럽힌 탐욕의 역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피로 씻어낸 이름 없는 영령들.
그 길을 걸으며 우리는 다시 묻는다. 진정한 독립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주권만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서대문형무소의 벽은 오늘도 묵묵히 말한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끝없는 싸움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