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10) 정조와 수원 화성 왕의 길 탐방기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정조의 꿈, 수원화성에 담다
방화수류정 천장 십자가 과학과 신앙, 그리고 백성을 향한 도시의 철학
1796년,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는 효심과 혁신정치를 결합해 수원에 새로운 이상 도시를 건설했다. 조선 최고의 실학 실천가 정약용의 과학과 개혁 사상, 그리고 곳곳에 남겨진 천주교적 상징(십자가 문양)은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 중심의 도시 비전으로 남아 있다.
본지와 신지식장학회 역사문화 아카데미 취재팀은 성곽길을 걸으며 정조의 꿈과 시대의 숨결을 느꼈다.
개혁 군주 정조, 이상 도시 수원을 세우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개혁과 실용의 정신으로 새로운 조선을 그린 군주였다. 그는 즉위 이후 오랜 붕당정치로 피폐해진 조정을 혁신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새로운 이상 도시를 건설한다.
정조는 현륭원(顯隆園)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그 주변에 새 도시 ‘화성(華城)’을 건설하도록 명했다.
현륭원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이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뒤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수은이라고 했다. 정조는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 영우원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원호를 현륭원으로 변경했다. 1815년(순조 15)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가 승하하자, 순조의 합봉 결정에 따라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그리고 1899년(광무 3) 고종황제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장조와 헌경왕후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은 융릉으로 봉릉되었다.
수원은 한양 남쪽의 교통 요충지이자 군사·상업적 중심지로서, 조선의 미래를 실험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외적에 대한 방어용 성곽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가 융합된 계획도시로 구상했다. 그는 백성의 삶과 함께하도록 수원화성을 행정 중심지이자, 상업이 발달하는 개방형 도시를 세우고자 했다. 이러한 비전은 당시 조선 사회의 경직된 신분 질서를 완화하고, 기술과 학문을 통해 새로운 국가 질서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1796년 3년 만에 완공된 수원화성은 성벽의 총 둘레가 5.7km, 높이 약 5m에 달하며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한 복합 구조로 축성되었다.
정조는 공사 기간 백성의 과중한 부역을 금지하고, 모든 자재와 비용, 공정 과정을 투명하게 기록하도록 지시했다. 이 기록은 훗날 ‘화성성역의궤’로 정리되어 조선 행정의 합리성을 상징하게 된다.
화성은 효와 충, 기술과 인문학이 공존한 최초의 도시였다. 정조는 백성이 평안해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는 이념 아래, 성곽 하나하나에 민본사상을 새겼다.
정약용, 기술과 사상을 담은 축성의 설계자
수원화성의 건설을 기술적으로 완성한 인물은 실학사상가 다산 정약용이었다. 당시 서른두 살의 젊은 학자였던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축성의 설계와 감독을 맡았다. 서양과 중국의 과학서적을 연구하여 거중기(擧重機)를 고안했고, 무거운 성돌을 인력의 절반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기계장치를 도입했다. 이 혁신적인 기술은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인부의 고된 노동을 줄였다.
정약용은 ‘기기도설’ 등 외국 기술서를 분석하며 수리학과 역학 원리를 조선식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효율과 기록, 인간 중심의 공학을 강조하며, 기술을 통해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실학사상을 구현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의 근대적 도시 비전으로 이어졌다. 또한 천주교(서학)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중시한 사고를 축성 설계에 반영했다. 수원화성 곳곳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의 천장에는 십자가 문양이 네 군데 새겨져 있으며, 일부 성문 기단부에서도 십자 형태의 조형이 지속해서 반복된다. 이는 건축적인 장식뿐만이 아닌 ‘하늘의 질서와 인간의 조화’를 상징하는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의 우주관이 건축적 형태로 구현된 것이다.
정약용은 축성 이후 공사 전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편찬했다.
이 책은 공정별 도면, 자재비, 인원, 기계 도표까지 세밀히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로 치면 ‘국가 프로젝트 백서’에 해당한다.
그는 기술과 행정, 신앙과 사상이 융합될 때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수원화성은 그 믿음의 결과물이자, 조선 실학의 최고의 정점이었다.
정조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18세기 조선이 남긴 가장 현대적인 도시 문화유산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도시계획·건축기술·실학사상의 융합 체로 평가받는다. 화성행궁, 장안문, 팔달문, 서장대, 방화수류정 등 주요 시설은 정조의 개혁 정신과 정약용의 실학이 한데 녹아 있는 공간이다.
탐방길에서 본 수원화성은 돌과 벽돌이 정치와 철학, 종교 사상과 어우러지며 시대정신이 잘 반영된 창의적 도시의 완성체이다. 서장대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전경은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장면이었다. 성벽을 따라 걸을수록 정조의 발자취와 개혁의 숨결이 느껴졌다. 특히 방화수류정의 천장 십자가 문양은 신앙과 과학, 그리고 인간 중심의 철학이 건축물 안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상징처럼 다가왔다.
수원화성의 의미는 과거의 민족 문화유산이 현재의 도시인들에게 보여주는 강한 성찰의 메시지다. 정조는 도시를 통해 정치의 중심을 백성과 더불어 하려는 사람 중심으로 옮기고자 했고, 정약용은 기술과 기록으로 그 뜻을 현실화했다.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의 도시재생과 공공건축, 지역공동체 형성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화성은 효와 충, 기술과 신앙이 함께한 조선의 근대적 실험장이었다.
정조의 애민정신과 정약용의 실학, 그리고 천주교적 상징이 어우러진 이 도시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인간 중심의 도시 모델이다.
수원화성을 걷는 일은 정조의 정신을 다시 발견하는 여정이다. 정조와 정약용, 신뢰로 쌓은 개혁의 동지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는 군주와 신하보다는 정치적 동지이자 사상적 교류였다. 정조는 젊은 학자 정약용의 비범한 식견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에게 조선의 개혁 실험을 맡겼다.
정약용은 권력보다 원리를 따르고,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학자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신뢰의 결합이었다. 정조는 정약용을 통해 실학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정약용은 정조를 통해 자신의 사상계를 현실 정치 속에 구현할 수 있었다.
정조는 유교적 도덕을 국가 운영의 근본으로 삼았으나 서학과 과학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사상과 기술이 조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정약용은 이런 정조의 포용적 시야 속에서 거중기와 수리학을 실험하고, 천주교적 인간 평등사상을 학문에 녹여냈다. 두 사람은 학문은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일치했고, 그 결과가 수원화성이었다. 화성의 축성 과정은 기술의 진보이자 사상의 실천이었다.
정조는 정약용을 규장각에서 수시로 토론을 했다. 정약용 역시 군주의 명을 충성으로만 따르지 않고, 논리와 근거로 설득하며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그들 사이의 대화에는 위계보다 이성적 토론이 있었다. 정조는 “약용의 말은 늘 옳다”고 했고, 정약용은 “성상께서 도를 밝히시니 학문이 꽃 핀다”라고 답했다.
군주와 신하의 신뢰는 시대의 한계를 넘은 합리적 동지요 동행이었다. 유교와 서학, 전통과 과학, 권위와 이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정치문화가 형성되었다. 정조의 포용과 정약용의 실천이 만난 순간, 조선은 비로소 실학의 근대화를 경험했다. 방화수류정 천정의 십자가 문양은 그 신뢰의 흔적이다. 그것은 군주와 학자가 함께 꿈꾼 ‘인간 중심의 세상’이 건축으로 구현된 상징이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한 시대들 살아간 이들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 꿈은 다시 거울이 되어 오늘도 누군가의 또 다른 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