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9)덕수궁 길 탐방기

김현종 · 2026-05-27 · 자유

대한제국의 시작과 고종황제의 좌절

고종황제,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의 시작을 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덕수궁은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공간이다.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고종 황제가 맞닥뜨렸던 조선 말 격동의 시대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이곳은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던 대한제국의 시작점이자, 제국주의의 폭풍이 몰아치던 국제정세의 외교무대였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한 격변기였다. 청나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우며 조선을 침탈할 기회를 엿보았다.

1894년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던 청과 일본이 조선 지배권을 두고 벌인 청일전쟁은 조선의 주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은 자주국이 아니라 일본의 세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청일전쟁 직후 일본은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개혁을 강요하고, 궁궐 주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본 공사관은 조정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시했고, 일본군은 고종의 동선을 제한하며 사실상 조선의 황제를 인질처럼 통제했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만행이었다.

일본 낭인과 군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조선의 국모를 살해한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고종은 극도의 위기와 불안감 속에서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종은 아관파천 후 1897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덕수궁은 원래 왕실의 별궁으로, 고종은 이곳에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덕수궁은 외세의 감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서양과의 외교 접촉이 가능했던 공간이었다.

고종은 서양 공사관들과 교류하며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세우기 위한 외교전을 펼쳤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897년 10월, 고종이 경운궁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사건이다.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올라 조선이 더 이상 속국이 아닌 독립 자주국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덕수궁은 이 역사적 순간의 무대가 되었고, 이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자존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요하며 외교권을 박탈했고, 결국 1910년 국권을 강탈했다.

덕수궁에서 피어난 대한제국의 꿈은 짧았지만, 그 뜻은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며 마주하는 것은 고종이 제국주의의 파고 속에서 꿋꿋이 자주와 근대화를 꿈꾸던 대한제국의 출발점이다. 덕수궁은 조선의 몰락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연 공간으로, 지금도 묵묵히 우리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월산대군과 선조의 귀환, 덕수궁의 또 다른 역사

원래 덕수궁 터는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이 머물던 연경궁 이었다.

월산대군은 왕이 될 기회가 2번이나 있었지만 결국 왕이 되지는 못한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1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숙부인 해양대군(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단종의 어린 나이를 명분으로 계유정란을 일으켜 조카를 폐위하고 왕이 된 세조가 어린 나이에 세손이 될 월산대군이 걱정되었을까? 예종이 1468년에 왕위에 즉위당시 월산대군의 나이는 15세였다.

그러나 예종이 불과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고, 다시 후계 문제를 두고 월산대군이 다시 오르내린다. 승하한 예종에 적자가 있었지만 겨우 4살이었다. 이번에는 한명회의 사위이자 대군의 동생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며 성종이 된다.

월산대군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일생을 보내면서 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후세에 종친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술과 풍류를 즐겨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파묻혀 살며 권력과 정치에 거리를 두며 살다가 1488년(성종 19) 12월 21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과 별했다. 친동생인 성종과의 관계도 각별하여 자주 만났다. 후대의 연산군과 중종도 월산대군의 후손들을 많이 아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의주목까지 피난 갔다가 돌아왔으나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 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였다.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덕수궁

임진왜란 때, 선조는 도읍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갔다. 왜적이 물러가고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선조는 왕족 월산대군의 집으로 들어갔다. 임시 거처였던 이 집이 ‘서궁’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 덕수궁엔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다. 왕실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별도의 궁궐로 쓰였던 덕수궁이 역사에 본격 등장한 때는 구한말이었다. 순종에게 왕위를 넘긴 고종이 이곳에 머물렀다. ‘고종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는 궁궐 이름이 정해졌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까지 약 10여 년간 한양에서는 역사에 획을 긋는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1895년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중화전의 전경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종은 덕수궁이 안전한 궁궐이라고 여겼다. 당시 덕수궁 주변엔 서구 열강의 공사관들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종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가까이 있는 공사관으로 몸을 숨기기 쉽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다. 애당초 덕수궁 정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정문 현판은 1904년 큰 화재가 난 뒤 바뀌었다.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는 새로운 현판이 내걸렸다. ‘큰 하늘의 문’이라는 뜻이다.

1852년생인 고종은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사망했다.

고종은 덕수궁이 품은 염원처럼 덕을 누리며 오래 살지는 못했다.

고종에게 내려진 ‘큰 하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돈덕전, 황제의 일상과 숨결이 남아있는 공간

바쁜 도심의 한가운데, 고요한 위엄을 간직한 덕수궁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대한제국의 희망과 좌절이 고스란히 배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100년의 시간을 넘어 최근 복원을 마치고 새롭게 우리 곁으로 돌아온 돈덕전(惇德殿)은 황제의 일상과 숨결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1902년에 건립된 돈덕전은 당시 대한제국이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주독립국으로서 국제사회에 당당히 서고자 했던 의지를 담고 있다.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이자 국가의 중요한 공식 의례를 치르던 공간이었다.

고종 황제는 국제 정세의 파고 속에서도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펼쳤고, 순종 황제는 즉위식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고자 했다. “덕(德)을 돈독하게 만든다”는 돈덕(惇德)의 이름처럼 이 공간은 황제가 백성과 국가를 향한 깊은 염원을 품었던 장소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건물의 벽에는 격동의 근대사를 관통하며 국가의 운명을 고뇌했던 황제들의 깊은 숨결이 스며들어 있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황실의 염원, 그리고 외세의 압력 속에서도 자주권을 지키려 했던 불굴의 의지가 이 공간 곳곳에 서려 있다. 한때 잊히고 훼손되었던 돈덕전이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된 것은 건물의 복원을 넘어, 대한제국 시기 우리 민족이 가졌던 근대국가 건설의 꿈과 저력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덕수궁 담장 아래서 설명을 듣고 있다. 과거의 유물을 넘어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대한제국 황제들이 마주했던 고뇌와 선택을 상기시키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역사적 통찰과 지혜와 더불어 깊은 영감을 제공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황제의 일상과 숨결’이 남아있는 돈덕전은 건축물을 의미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향한 비전과 불굴의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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