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8)세종로 길 탐방기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세종의 꿈! 훈민정음을 만들다. 백성을 향한 깊은 애민정신- 백승기

세종의 통치는 철저히 백성을 향한 애민정신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나라의 중심을 군주 자신이나 권력층에 두지 않고, 늘 백성에게 두었다. 국왕으로서의 권위보다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그의 모든 정치와 개혁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을 국가의 기본으로 삼았다.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각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농사법을 정리하고 보급한 것은 백성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땀 흘리는 농부들의 손에 직접 도움이 되는 생활 지침서였다.

또한 자연재해와 흉년이 닥쳤을 때 세종은 국가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진휼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는 일시적인 동정이나 시혜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백성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철학에서 나온 것이었다. 애민은‘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곧 국가 운영의 근간이자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백성들의 삶의 현장, 논밭과 장터, 마을 공동체로 눈을 돌렸다. 백성의 고통과 필요를 헤아리며 이를 국가 정책에 반영했기 때문에 조선은 안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K-한류 선언과 훈민정음 창제

한글 창제는 조선을 외세에 의존하는 속국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 자리매김하기를 염원했다. 세종은 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와 과학, 제도 전반에서 자주적인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 시대에 이루어진 천문학·역법·농업·병기·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개혁은 ‘조선은 자주적인 힘으로 국가를 개혁할 수 있다’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예컨대 측우기 제작과 혼천의 개발은 과학기구의 발명이 아니라 하늘의 운행과 기후를 스스로 관측하고 해석하겠다는 선언이었으며, 화포 개량과 군사무기 발달은 외세의 침략에 의존하지 않고 국방을 자주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자주적 국가 체계 구축의 정점에는 바로 훈민정음 창제가 있었다. 당시 한문은 지배계층과 일부 학자들만 습득할 수 있었고, 대다수 백성은 문자 생활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국정 운영과 생활 속에서 문자로 의사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은 곧 국가적 한계로 작용했다.

세종은 이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문자 없는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곧 국가의 자존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훈민정음 서문에 등장하는 ‘中國’이라는 표현도 흔히 오해되듯 명나라(중국)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계층 간 사회적 격차로 인하여 문자의 소통이 불가능한 조선 국내(국가 내부)의 암울한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한글을 반포한 1446년에는‘중국’이라는 국가명은 없었다. 하여 정확한 해석은 중국이라고 하기보다 국내에서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현재의 관점과 시각으로 과거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 또한 경계하여야 하는 오류다.

훈민정음은 외부 문명에 종속된 언어체계를 답습하는 대신, 철저히 백성을 위한 새 문자를 창제함으로써 우리 손으로 우리의 문화를 세웠다.

문자 생활을 통해 백성들이 정치·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곧 국가 통합력과 자주적 역량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훈민정음은 학문적 성과나 백성을 위한 애민 정책의 차원을 넘어, 조선이 독립적이고 주권적인 국가임을 대내외에 드러낸 사건이며, 역사적인 K-한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 인재 발굴과 집현전

세종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탁월한 안목을 지닌 군주였다. 대표적인 예로서 다섯 살에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 소년 김시습을 불러 시험하고 크게 칭찬한 일화는, 세종의 예리한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세종은 김시습이 장차 조선을 이끌 해동공자가 되리라 기대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근본 자산은 곧 인재”라는 확신을 드러냈다. 불행하게도 세종이 승하하자 김시습은 방랑의 길을 떠나고 만다. 단종이 삼촌인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영월 유배지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사건은 김시습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세상과 단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는 김시습의 사유와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세종의 리더쉽은 참된 인재들이 있어야 완성된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었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바로 집현전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과 정책 연구를 전담하게 하고, 인재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연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집현전은 국가 정책과 제도의 기초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두뇌 집단이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역시 이곳에서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기초과학과 학문 연구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를 통해 천년대계를 다시 준비해야 한다. 물리학과 수학 같은 기초학문은 당장은 성과가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는 AI 과학기술과 산업, 국가 경쟁력을 떠받치는 토대가 된다. 천년을 내다본 세종의 안목처럼 기초학문과 창의 인재 양성을 국가 운영의 중심에 두는 세종의 집현전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통해 품은 꿈-오춘성

大同千古蓋夢龍(대동천고계몽룡)

‘왕의 길을 걷다’ 에 참여하여 도성 궁궐을 걸었다. 조선왕조 500년의 꿈과 최고의 성군이던 세종대왕의 꿈을 보았다. 온 백성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눔과 포용 속에 조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나눌 참된 지도자가 가슴 시리도록 기다려진다.

大同千古蓋夢龍은 훈민정음 혜례본(국보 제70호) 용자례가 시작되는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에는 대왕의 왼손에 훈민정음 혜례본이 펼쳐져 있는데, 여기에 적혀있는 글이 ’대동천고계몽룡‘이다.

대왕께서 재위에 계신 31년 6개월 중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지만, 말년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글을 반포하시며 품은 꿈이 ’대동천고계몽룡‘ 이었다.

대왕의 꿈은 후대에 모든 백성이 문맹에서 벗어나 천대받지 아니하고 다 함께 태평성대를 누리는 홍익세상을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대동천고계몽룡‘ 대해서 많은 학자의 해석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홍기문은 “동편 땅에 어두움 여셨다”라고 하였고, 강신항은 “대동 땅 천고에 어둠을 깨우치셨네” 했으며, 박지홍은 “우리나라에 영원토록 어둠을 가셨구나”라고 하였고 국립국어원은“ 우리나라 오랜 역사에 어둠을 깨우치셨네”라고 해석했다.

우리말은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 있어 표의문자와 음차 언어의 간극이 존재했다.

뜻풀이에서 한글 창제 당시 조선어 의미를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윤기는 “동방의 큰 나라 조선이 오랜 역사의 어둠을 깨고 훈민정음을 통해 인류문명의 시작을 열도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은 큰 틀에서는 같은 뜻으로 이해되나 백성들이 대부분이 글을 몰라 지식과 정보를 나눌 수 없으매 쉽고 간편한 글자를 만들어 모든 백성이 문맹에서 벗어나 다 같이 잘사는 참된 세상에 살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대왕은 평생 과학을 발전시켜 축우기, 해시계, 저격루, 혼천의와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의학서인 ’의방유취, 향약집성방‘과 농업 기술서인 ’농사직설, 산가요록‘을 편찬하여 보급하였다

또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침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고자 하셨다.

참된 군주의 백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 애민정신이며, 태평성대 이루어 아래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참된 세상을 열고자 했던 꿈이 세종대왕의 꿈이라 생각된다.

참된 지도자는 편 가르며 휘둘리지 않고, 모든 국민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여 조화로운 세상을 통해 태평성대, 국태민안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지도자와 정치권을 돌아보면, 편 가르기에 헐뜯고 모략하고 빼앗으려는 일상으로 국민이 휘둘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참 그지없다.

참된 지도자 큰 바위 얼굴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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