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7)돈의문·한양도성길 탐방기
김현종 · 2026-05-27 · 자유
한양도성과 4대문, 잃은 것과 남은 것 도시는 역사를 지워야 성장 하는가?
서울 도심 서대문역 사거리, 강북삼성병원 B관 모서리 대로변에는 작은 표식 하나가 서 있다.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 돈의문이 있던 자리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 문은 없다.
일제강점기 도시 정비라는 명목 아래 강제로 철거된 뒤, 도로와 건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표식만 덩그러니 남아 당시의 흔적을 전할 뿐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곳에 서면 보이지 않는 문을 마음속에 그리며 “우리는 왜 지켜내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을 떠올린다. 사라진 흔적은 역사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강렬한 메시지다. 눈앞의 빈자리 속에서 역사의 상처와 책임이 함께 드러난다.
돈의문은 사라졌지만, 그 결핍이 오히려 존재감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돈의문 터에서 출발해 인왕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 길은 과거와 현재가 맞부딪히는 현장이다. 복원된 성벽 위를 걷다 보면 600년 전 한양의 기운이 살아나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현대 서울의 아파트 빌딩 숲과 맞닥뜨리게 된다.
일부 구간은 잘 정비되어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지만, 다른 구간은 도로와 건물에 가려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성곽이 도시 속에서 끊기고 이어지는 풍경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역사와 어떻게 타협해 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곳을 걷는 이들은 산책이 아니다. ‘도시는 역사를 지워야 발전하는가, 아니면 역사와 함께 성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인왕산으로 향하는 구간은 그 답을 묻는 시험장이자, 서울 정체성의 축소판이다.
한양도성
도성이란 사전적 의미로 왕이나 황제가 있던 도읍지가 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울을 이르던 말로 왕궁과 다양한 시설로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예부터 한민족은 산성의 나라를 세웠는데 토성에서 점차 견고한 석성을 축조하여 변방의 성과 성이 연이어서 방어와 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도성은 산성에 가깝거나 전시에 산성을 도성으로 이용한 경우가 많았다. 험한 바위 등 지형지물을 이용해 성곽을 쌓아 적을 굽어보며 싸울 수 있었고 높은 성벽과 치, 옹, 포대 등의 구조물로 효율적인 공방을 하였다.
강군이라도 병력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요새화된 성에 들어가 농성하며 들판의 식량과 물품을 소각하고 경기병을 내보내 적의 보급소를 기습하는 청야입보 작전을 썼다. 한양도성 또한 전통적인 축성 기법을 이어받아 축조하였다.
조선 창업 직후 이성계의 한양 천도 의지에 따라 무학 대사는 풍수지리를 근거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궁궐을 동향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제왕남면과 유교적 원칙인 좌묘우사에 따라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맞섰다. 이 논쟁은 숭유억불정책의 선봉에 선 정도전의 의지가 관철된 승리로 끝났으며 선바위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정도전은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위치를 정하고 사대문과 종각의 명칭에 음양오행의 덕목에 해당되는 오상의 인의예지신을 붙여 유교적 가치를 담아냈다.
이후 조선 중기에 몇 차례의 전란을 겪은 후 숙종이 한양도성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북한산성을 완공하고 두 성의 연결을 위해 인왕산 동북쪽부터 시작하여 탕춘대성을 쌓았다.
관리부실과 대일항전기의 대홍수로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여 국가사적 지정 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네 개의 문, 네 가지 삶의 가치
조선건국의 사상과 철학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를 근간으로 하여 민본주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도성 한양의 4대문이며 이름과 형식 또한 이러한 사상과 철학적 배경에 의해 만들어졌다.
먼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은 예(禮)를 숭상한다는 뜻으로, 예의 덕목을 상징적으로 부여하였다. 예는 유교의 전통적인 종교의례·윤리·습속·제도 등의 각 관행을 통해서 실천되고 엄격한 형식과 사회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북쪽의 홍지문(弘智門)은 지혜를 널리 펼친다. 는 의미로 지(智)를 상징하는데 현재는 숙정문(북대문)이 대신하고 있다.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처리하여 널리 이로움을 얻고자 함은 단군 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을 이어 받음이다.
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은 의리를 돈독히 한다. 는 의미로, 서쪽 문에 의(義)를 부여하였다. 세상만사의 모든 행함에 지켜야 할 바른 도리이며 대의명분은 조선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마지막으로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어짐을 일으킨다. 는 의미로, 동쪽 문에 인(仁)을 상징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어질게 행동하는 인의 사상은 백성을 사랑하고 위하는 정치를 펼쳐 민본주의의 실현과 실천을 강조한다.
조선의 4대문은 방위를 나타내는 도성의 경계가 아니라 “인의예지”를 통하여 조선의 국가 운영과 정치 철학의 기초를 상징하였으며 항시 문을 드나드는 백성들에게도 마땅히 따르고 본받아야 할 삶의 규범이었다. 인의예지가 바로 서는 사대문 안과 밖의 조선의 백성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꿈꾸고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타고, 사라지고, 한양 도성의 시련
한양 도성의 대문과 소문들은 조선의 건국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시련 속에서 불타고,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는 역사를 반복하며 한국사의 상처와 회복을 생생히 증언한다. 국가의 흥망성쇠와 백성의 삶을 담아온 살아있는 기록이다.
한양 도성의 문들이 겪은 첫 번째 큰 시련은 임진왜란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궁궐과 수많은 문루들이 불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중 혜화문(동소문)의 문루는 임진왜란 당시 완전히 소실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가장 비극적인 훼손은 일제침탈로 인한 대한독립 전쟁기다. 일제는 민족정기 말살 목적으로 많은 성문을 의도적으로 훼철하였다.
돈의문(서대문)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려버려 현재는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소의문(서소문) 또한 훼철된 후 지금까지 원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 문들은 민족 수난의 대표적인 사례다.
광희문(남소문)과 혜화문(동소문)은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현재 복원되었지만,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세워지는 아픔을 겪었다.
‘사라진’ 문이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고 변형된 형태로만 존재하게 된 비극적 현실을 보여준다.
다행히 창의문(북소문)은 산속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온전히 견뎌내며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도성의 문들이 겪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2008년 숭례문(남대문) 방화 사건이었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타는 비극은 국민 모두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다행스럽게 숭례문은 국민의 열망으로 복원되었다. 이는 파괴를 극복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려는 강력한 의지이자, 역사적 아픔을 승화시킨 회복의 상징적인 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양 도성의 문들은 ‘불타고’,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는’ 변천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동대문은 흥인지문으로 남대문은 숭례문으로 호칭해야 한다. 4방위보다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의미를 담아서 부르면 역사는 더 아름다울 것이다.
오늘의 순성길, 시민이 잇는 역사?
가을비 잠시 숨을 고르던 백로(白露) 절기의 주말 한양도성 순성길을 걸었다. 돈의문터, 홍난파 가옥, 창의문, 인왕산, 수성동 계곡으로 길목을 정한 ‘걸어서 역사 속으로-왕의 길을 걷다’ 탐방단을 따라서.
인왕산 아래 서촌에 보금자리를 얻어 20년째 살고 있는 터라 한양도성 순성길은 내게 낯익은 길이고, 인왕산과 수성동 계곡은 인생의 갈 길을 아직도 제대로 잡지 못한 이 백면서생에겐 오랜 사색의 공간이다.
오랜만에 다시 걷는 순성길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한양도성 순성길의 한 코스인 인왕산 둘레길 코스는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평일엔 특히 종로구, 서대문구 주민들의 발걸음이 잦고, 주말엔 먼 거리에 사는 서울시민들도 이 길을 걷는다.
수성동 계곡엔 ‘쉼’이라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