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6)창덕궁 탐방기
김현종 · 2026-05-27 · 자유
인정전, 어진 정치의 교훈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조선 정치의 심장부였다. 이곳에서 임금은 즉위식을 거행하고 신하들과 나라의 대사를 논의했다. 전각 이름에 담긴 ‘어진 정치’라는 뜻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군주에게 주어진 준엄한 명령이다.
인정전의 높이 솟은 기둥과 화려한 단청은 왕권의 위엄을 상징했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백성을 향해 있었다. 군주는 백성의 삶을 위해 봉사해야 할 책무임을 되새겨야 했다. 권력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사실, 그것이 인정전이 전하는 가장 큰 교훈이다.
오늘날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집무실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중심 공간은 권력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곳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민생을 살피는 열린 광장이 되어야 한다. 인정전은 권위와 덕목이 함께 요구되는 자리를 상징했다. 정치란 곧 백성을 위한 봉사이며, 지도자는 언제나 어짐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가 이 공간에 깃들어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지도자의 권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소통과 책임을 잃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정치의 본질은 권위의 장식에 있지 않고, 국민과 더불어 숨 쉬는 어진 마음에 있다. 인정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 우리 정치가 회복해야 할 것은 권력의 화려함보다 기쁨과 슬픔을 국민과 함께하는 인정(仁政)이다.
선정전과 희정당, 소통과 기쁨의 집무실
창덕궁의 중심 전각 가운데 하나인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이 신하들과 만나 국정을 논하던 집무 공간이다. ‘선(宣)’은 베풀고 드러낸다는 뜻이고‘정(政)’은 다스림을 뜻한다. 이름 그대로 선정전은 임금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베풀겠다는 의지를 담은 전각이다. 이곳에서는 조회가 열리고 국정이 논의되었다. 신하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며 백성의 삶을 살피는 실질적 정치의 무대였다. 선정전의 단아한 구조와 절제된 장식은 소통의 중요성을 앞세우려는 민본 정치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선정전 동측에 위치한 희정당(熙政堂)은 임금이 일상적으로 머물며 집무를 보던 내전 겸 집무실이다. ‘희(熙)’는 빛나고 기쁨을 뜻한다. 정사를 다스리되 백성과 함께 기쁨을 나누겠다는 군주의 바람이 담겼다. 희정당은 소박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풍긴다.
정조는 이곳에서 개혁의 비전을 구상하고, 젊은 인재들을 불러 학문과 정치를 논했다. 소통을 중시하는 정조의 정치 철학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선정전과 희정당은 각각 외적 국정 운영과 내적 성찰, 형식적 권위와 실질적 소통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지도자가 어떤 자세로 권력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묻는 역사적 교훈의 장소다.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국민의 삶을 밝히는 희망의 등불 이어야 한다.
동궁, 교육과 효의 터전
동궁은 왕세자가 거처하며 학문을 닦고 정치를 배우던 곳이다. 궁궐의 동편에 위치하여 봄의 떠오르는 해처럼 미래의 군주로 성장함을 의미한다. 왕세자의 별칭이자 왕실의 안정과 연속성을 보여주는 희망의 공간이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올렸는데 충과 효, 예의 기본적 행위이자 정통성을 확인하는 퍼포먼스였다. 조선 중기에 정궁이었던 창덕궁의 동궁도 역대 왕들이 거쳐 간 곳이다. 정조 또한 세손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할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동궁에서 지냈다.
영조에게 효심을 다하면서도 자신을 자주 찾아오도록 길목을 정비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노론 세력의 견제 속에서 늘 불안정한 위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22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자리에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하며 정적들에 대한 경고와 왕실의 정통성을 공고히 했다. 부모님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무려 13번이나 행차했으며 장용영 창설과 화성을 축성했다. 효심의 발로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고 백성들과 소통하며 개혁 정치를 펼치려는 깊은 의지도 담고 있었다. 사도세자에게는 좌절의 원인이었던 효가 정조에게는 수기치인 뿐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강력한 도구로 활용된 것이다. 효명세자는 아버지를 위해 사대부가의 형태인 집을 지어 효도하였고 순조의 명에 의해 대리청정을 맡기도 했는데 동궁은 임시 정전의 역할도 맡았다. 이처럼 동궁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효라는 추상적 이념은 조선 왕조의 흥망과 왕실 구성원의 운명을 결정짓는 특별한 장소였다. 창덕궁을 세운 태조와 재건한 광해군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법궁)으로, 국가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면, 창덕궁은 그보다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별궁의 성격이 강했다. 태종은 북악산 동쪽 기슭의 완만한 지세를 살려 궁궐을 배치했고, 직선과 대칭으로 웅장함을 강조한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굽이진 지형을 그대로 따라가며 건축되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홍익인간의 민족철학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창덕궁은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로부터 18년 뒤, 광해군은 무너진 궁궐을 다시 세우며 1610년에 왕실이 입궁할 수 있도록 중건을 완수하였다. 경복궁이 전란 이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상황에서, 창덕궁은 이때부터 사실상 조선의 법궁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후 인조반정 이후에도 조정은 창덕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19세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약 270년 동안 조선 왕조의 실질적인 정치 무대가 되었다. 창덕궁의 역사는 곧 왕조의 흥망과 회복의 역사였다. 태종이 세운 창덕궁은 건국기의 이상을 담았고, 광해군이 다시 일으킨 창덕궁은 전란 속에서 국가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담았다. 위기 속에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정신, 그것이 창덕궁의 진정한 가치이자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그대여! 꿈은 있는가? 낙선재, 겸손과 절제의 삶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조선 왕가의 침전으로 사용된 낙선재가 있다.
낙선재의 기본 몸체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나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2칸 더 나있어 실제로는 15칸이다.
누마루의 하단은 화강석을 길게 깎아 만든 주초 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했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했으며 양반가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기에 잡상은 놓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단청의 주목적은 색을 칠하는 건물이 돋보이게 하고 권위를 살리기 위하여 궁궐, 사찰, 서원 등에 사용되었다. 또한 실용적 용도로는 나무에 벌레가 먹지 않게 하고 썩지 않게 하고 소나무의 균열을 감추고 건축의 결함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30~40년 정도마다 다시 칠하였다.
낙선재가 궁궐내의 다는 침전건축과 달리 단청 없이 일반 사대부의 주택 양식을 따른 이유는 무엇일까?
왕가의 가족들에게 주거공간을 통하여 비추어지는 절제된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자 하는 의도된 목적이 있어 보인다. 실제 주거하는 공간만큼은 궁궐의 권위를 걷어 내고 실용적이고 친숙한 모습으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다가가고 소박하고 절제된 생활을 통하여 만인의 모범을 보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낙선재를 보며 오늘의 용산 대통령실이 같은 목적으로 청대와대에서 많은 비용을 들이며 까지 이전하였기를 바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용산 대통령실이 친숙하고 소박한 외면과 달리 내면의 모습과 삶은 그러하지 않았던 것 같아 보여 오늘 보는 낙선재의 모습이 달리 보인다.
금천교, 권력자의 첫걸음
창덕궁의 진선문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 궁을 가기위한 통과 다리로 궁궐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이며, 속세와 왕도 정치의 세계를 잇는 관문이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늘 맑고 투명해야 했다. 아쉽게도 요즘은 물이 없다. 물은 청렴과 정결, 곧 지도자가 지녀야 할 첫 번째 덕목을 상징한다. 임금과 신하들은 궁궐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는 권력의 문턱을 넘기 전 마음을 정화하고 스스로를 단속하라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금천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