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5)후원 탐방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후원의 아침, 자연과 어우러진 풍수지리
부용정 난간에 눈을 감고서 잠시 기대어 본다. 주합루에서 승재정에서, 정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자연과 바람을 벗 삼아 한잔 술 하셨을까.창덕궁 후원은 고된 정무에 지쳐 쉬는 휴식처가 아닌 조선 왕실의 사유와 철학이 집약된 공간이다. 후원은 자생풍수지리학의 원리에 따라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며 설계되었다. 부용지의 연못은 하늘과 땅, 즉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상징적 공간으로, 사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드러내며 자연의 변화를 담아낸다. 연못을 감싸는 숲과 언덕은 인위적으로 잘라낸 구조물이 아니라, 본래 지형을 살려 만든 자연의 병풍이다. 건물들 또한 직선적인 질서보다는 곡선과 굴곡을 따라 배치되어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러한 후원의 구조는 임금에게 그저 휴식을 넘어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자연을 억압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듯,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후원은 피상적 아름다움의 정원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일깨워주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철학적 공간으로 살아 있다.
백성을 향한 밝은 정치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은 육각 지붕을 두 겹으로 올린 특이한 형태의 정자이다. 주변의 다른 정자들과 돌다리 등 자연과의 조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정조는 종종 이곳을 찾아 신하들과 더불어 정국을 논하고 경치를 즐겼다. 규장각을 세워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고 당파를 초월한 개혁정치를 펼쳤다. 무예도보통지를 통한 문무겸전과 장용영, 화성 건설 등으로 자신의 안위와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려 노력하였고 그러한 염원과 의지를 담은 글을 새겨 존덕정에 걸었다.
만천은 백성을, 명월은 정조 임금 자신을 뜻한다. 졸하기 2년 전인 1798년(정조 22년)에 만천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천자만홍이 하나의 태극으로 합치되는 이치로 자신을 태극인 리에 상정하며 천명한 것이다. 건강도 안 좋고 당시 45세의 나이는 평균 수명에 가까웠으므로 스스로 주인옹이라 하였을 것이다. 문집인 홍재전서에 주역 계사전과 설계전을 인용하여 물과 달을 보고서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우친 바 있었다며 세상을 이끌어가는 좋은 방법과 사람을 그대로 두는 방법에 대해 터득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사람은 각자 생긴 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물의 상태에 따라 달도 달리 비추니 그에 맞게 밝은 덕으로서 백성을 대하는 것이 군주의 자세일런가.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를 여러 신하들에게 필사하게 하여 전각의 여러 곳에 걸었다. 아!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런 요즘 소용돌이치는 만천을 명월은 어떻게 비칠 것인가…….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演慶堂)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으로 1828년 효명세자가 순원왕후를 위해 지은 건물로 이곳에서 어머니를 위해 진작례(進爵禮)를 열고 춘앵전을 바치며 깊은 효심을 드러냈다.
춘앵전은 봄날 꾀꼬리의 노래를 형상화한 무용으로, 아들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사랑과 효심이 예술로 승화된 사례다. 효명세자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문화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연경당은 그 상징적 무대였다. 연경당에서 춘앵전이 올려지던 장면을 상상하면, 효심이 단지 개인적 덕목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감동시키는 힘임을 깨닫게 된다. 효와 예술, 정치가 함께 어우러진 연경당은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을 주는 역사적 유산이다.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잠시 효명이 되어 대연회를 베풀어 보는 상상에 마음이 울적해진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리 빨리 가셨는지, 못난 아들은 지금도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인가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두 분의 임금을 만나 본다.
먼저 연산군은 유흥과 사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후원에서 미모가 뛰어난 자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직접 새나 짐승을 놓아기르며 사냥을 즐기는 기상천외한 일탈들을 저질렀다. 1497년에는 서쪽의 담을 높게 쌓았는데 백성들의 눈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유락을 즐기는데 신경이 거슬리는지 담 밖에서 보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백성과 신하들의 눈과 귀를 멀리 두고 본인의 비밀스런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고 후원(後苑)에 2층으로 된 주합루를 건축한다.
1층의 규장각은 도서열람실로 신하들과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며, 정면의 어수문은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으로 임금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현판은 정조의 친필로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어수문은 사각기둥 위에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되었는데 왕과 신하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한 것이다.
같은 공간 다른 두 임금의 존재와 행적을 통해 현재의 교훈은 무엇일까?
탐욕, 욕심이 넘쳐나면 막으려하고 감추어 문을 닫아 세상의 눈과 귀를 멀리한다. 올바름과 떳떳함이 자리하고 배품이 넘치면 항상 문은 열리고 자연스럽게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창덕궁 후원 ‘부용정’ 단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엔‘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간판을 내건 전통·민속주점이 있다. ‘천강에 비친 달’은 작가 정찬주의 장편소설이다. 세종대왕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의 비밀 이야기를 다뤘다
지난 토요일 인사동 인근 창덕궁 후원의‘부용정(芙蓉亭)’ 앞 연못엔 연꽃 한 송이가 꽃망울을 활짝 터트리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별궁 창덕궁에 이토록 아름다운 정원을 꾸민 이유가 뭘까. 조선 왕조는 도덕과 윤리적 이상을 실천하려 창덕궁(昌德宮)을 지었다. 창덕궁의 정궁 ‘인정전’은 ‘어질 인(仁)’자를 붙인 전각이다. 창덕궁 편전 ‘선정전’은 ‘베풀 선(宣)’을 붙였다. 왕과 왕비가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공간이라는 창덕궁 후원. 이곳의 부용정을 살펴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자고이래로 권력은 민초들의 삶과 영 딴판인 뜬구름이었다. ‘정치(政治)’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정치인은 제 가정도 아니고, 그들만의 패거리도 아니다. 국가와 민족, 인류를 고민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창덕궁 후원에 들러 수백 년 동안 부용정에 비친 달빛을 헤아려보자니 정자의 이름을 바꿔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물에 떠서 사는 풀’을 ‘부초’라 한다. ‘부초정(浮草亭)’으로 보였다. 진심을 담아 눈을 감고 기도했다. 8월 무더위 속에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신지식 탐방대에 늘 감동이다. 일기예보가 비 소식을 전하기에 우의랑 우산을 챙겼건만 날씨는 적당히 무더워서 궁을 거닐기에 적당했다. 승재정이라는 아주 작은 정자가 있었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기에 3번째 돌계단에 앉아 진심을 담아 눈을 감고 기도했다. 눈을 감으니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 현판이 떠올랐고, 마치 역사가 지금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젊은 친구들과 함께 하니 탐방대가 훨씬 젊어지고 활기찬 느낌이었다. 창덕궁 역사탐방은 조상들이 강조해온 청렴과 충효, 민본사상의 가치를 작금의 시대에도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역사는 늘 조용히 말을 건넨다. 연경당에서 들은 춘앵전 이야기는 마음 깊이 잔잔한 감동을 남겼다. 후원을 거닐며 우리는 역사의 울림을 느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조심스럽게 그려볼 수 있었다. 청렴한 정치, 따뜻한 효와 사랑, 그리고 사람을 아끼는 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치임을 다시금 되새겼다. 걸어서 역사 속으로’그 여정은 우리 세대가 품어야 할 꿈과 방향을 찾아가는 귀한 시간이었다. 역사는 늘 조용히 말을 건넨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며, 지금 이 순간은 곧 내일을 만드는 씨앗이다. 오늘의 삶을 아끼고, 이 소중한 기억들을 마음에 곱게 간직하자.
정조 진짜 정치를 말하다
부용지에 피어 있는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향기와 맑음을 잃지 않았다. 이는 공직자 청렴의 상징으로 옛 선비와 임금에게 중요한 덕목이었다. 부용정은 바로 그 연꽃처럼 청렴의 상징으로, 옛 공직자들은 이곳에서 토론하며 국정을 논하던 자리였다.
부용지 남쪽에 자리한 영화당은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전시가 열리던 곳으로, 조선의 인재 등용이 얼마나 공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북쪽 언덕 위의 주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