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2)사직단 탐방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백성을 섬기는 정치! 국가는 민생을 책임져야 한다. 사직은 하늘 땅 사람을 잇는 성스러운 약속이다

인간은 흙과 곡식의 은혜를 잊은 채 회색의 길 걸었고 하늘의 이치와 땅의 숨결을 외면한 채 바쁘게 살아왔다 역사의 강둑에 나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나를 살린 것은 곡식이었고 우리를 지킨 것은 땅이었다

사직(社稷)은 조선의 국본(國本)을 부여한 두 기둥으로 社는 토지 신을 섬기고, 稷은 곡식 신을 섬기는 것이다 임금은 나라의 평안(安寧)과 풍년(豊年)을 기원하기에 천지와 생명의 순환을 제의로 풀어낸 하늘의 축제였다

돌계단을 올라가며 제단(祭壇)의 고요는 온몸을 감싸고 산들바람 논밭의 따스한 향기 실어와 귓가에 속삭였다 제단에서 울려 퍼진 큰 북소리는 백성들의 삶을 울리며 향연(香煙)의 기운은 하늘땅을 잇는 성스러운 약속이다

사직단의 담장과 기둥, 양 제단은 세월에 마모되었으나 그 위에 깃든 정신(精神)만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한 줌의 흙에도 백성을 품어낸 도리(道理)가 있었으며 한 톨의 곡식에도 세대를 이어온 생명의 맥이 숨 쉰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어디에 뿌리 두고 살아가나 토지(土地)와 곡식(穀食)을 잃으면 근본 뿌리 잃는 법 사직단은 일반 유적(遺蹟)이 아닌 살아 있는 교훈으로 이 땅을 걷는 자들의 가슴에 천지인삼합의 정신을 잇자

사직단에서 배우는 국가와 민생의 교훈

사직단은. 땅과 곡식 ‘토지와 식량’이라는 인간 생존의 가장 필수적이며 기초적인 요소에 대해 왕이 직접 제사를 올리던 국가의 제단이었다. 경복궁의 서쪽, 지금의 서촌과 사직터널 사이에 있는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조선 왕조 통치 철학의 양 축을 이루며, 국가의 정신적 근거지를 상징한다.‘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오곡의 신을 의미한다. 땅과 곡식을 신격화하여 국가와 백성의 생존 기반으로 숭상한 것이다. 이는 조선이 농본 국가였다는 점을 넘어서, 정치란 백성의 삶과 생계를 지키는 행위라는 깊은 인식을 보여준다.첫째, 사직단은 ‘국가는 민생 위에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살아야 하고, 국민이 살아가려면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 해결되어야 한다. 조선의 왕은 하늘에 제사하는 종묘보다도, 때에 따라서 사직단을 더욱 엄숙한 곳으로 여겼다. 이는 국가 권력의 목적이 권위보다는 백성의 생존 보장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정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럴듯한 정책도 국민의 밥상과 일자리를 해결하지 못하면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둘째, ‘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일깨워준다. 왕은 매년 곡식이 잘 되기를 기원하며 땅에 지극한 예를 갖췄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존해야 할 대상임을 인식한 태도다. 현대 사회는 기후위기와 환경 파괴 앞에서 다시금 사직단의 민본철학을 되새겨야 한다. 경제 개발과 성장만을 좇기보다는, 자연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지속 가능한 삶의 지혜가 요구된다.셋째, ‘지도자의 책임 윤리’를 상징한다. 제사는 의례가 아닌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 땅과 백성의 삶을 책임지겠다’라는 지도자의 강한 메시지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권력의 중심이 왕이 아니라, 토지와 백성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자인 지도자는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선거마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민생을 책임지는 정치,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사직단은 우리에게 멀어지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민본 정신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생존의 기본을 중시하고, 자연을 존중하며, 권력을 책임으로 여기는 태도. 이것이 사직단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값진 유산이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과 의미

좌묘우사는 고공기(考工記)에 기록된 내용을 기초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때 왕궁의 왼쪽(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서쪽)에 사직을 두는 도성 배치의 원칙이다. 이는 유교 국가의 통치 이념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며 국가의 근본임을 상징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묘(宗廟)는 왕실 조상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왕조의 정통성과 계승을 상징하며,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394년(태조 3년) 10월 25일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태조 이성계는 11월 2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서운관(書雲觀)의 서리들을 직접 인솔하여 종묘와 사직단의 터를 살펴보고 결정하였다.

사직단은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서쪽 인달 방(현재의 사직동 일대)에 터를 잡았고, 공사는 1395년(태조 4년) 1월 29일에 시작하여 2월 27일에 완공되었다

사직단 제단은 중앙에 있는 주 제단으로 높이 약 4척(약 1.2m), 사방 각 2장 5척(약 7.5m)의 정사각형 형태로, 흙을 다져 만들었다. 동쪽에는 토지의 신인 사(社)를, 서쪽에는 곡식의 신인 직(稷)을 모셨다.

또한, 신위를 모시는 신실(神室), 사직단 영역을 둘러싼 담장의 유문(維門), 사직단 관리를 담당하는 사직서(社稷署) 등의 부속 건물도 함께 갖췄다.

사직단은 국가의 근본을 상징하는 중요한 제례 공간으로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 시 기우제나 기청제 등의 임시 제사도 지냈다.

사직단에서의 제사는 왕이 직접 초헌관(初獻官)을 맡아 진행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중앙의 사직단뿐만 아니라 지방 고을에도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1406년(태종 6년)에는 사직단을 수리하고 수호하는 인정(人丁)을 배정하는 등 관리에도 특별하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사직단은 고종황제 제위 시대인 1902년(광무 6년)까지 유지되다가, 관리 관청인 사직서(社稷署)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사직단을 공원으로 변경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와 맞물려 있다.

현재 사직공원 내에 복원되어 있으며, 그 역사적 가치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사직단의 神은 가깝고 종묘의 神은 멀다(?)

‘한국관광공사’가 제공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에 이름난 공원이 세 곳 있다. 사직공원, 탑골공원, 삼청공원.

인왕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사직공원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1395년 종묘와 함께 만들기 시작한 사직단(社稷壇)을 한복판에 두고 있다.

지방에도 사직단이 있다. 부산의 동래구 사직동, 광주 남구 사직공원, 청주 사직공원 등에 지방 사직단의 옛 자취가 남아 있다. 이들 지방 사직단에서도 서울의 사직단처럼 국태민안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수도 서울의 사직단 인근 서촌마을에서 터를 잡고 산 지 벌써 21년째다. 사직공원의 풍경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산 지도 벌써 20년이 넘은 셈이다.

사직단 근처엔 배화여자대학, 배화여중·고, 대신중·고가 있다. 대신중·고를 나온 우리 집 아들은 중학교 시절, 사직공원에서 친구들과 야구를 하다 눈을 다친 적도 있다.

집에서 걸어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사직공원에서 나는 산책도 했고, 때론 걷거나 뛰며 운동을 했다. 이렇게 사직공원을 산책코스로 삼고, 체력단련장으로 이용하는 것은 비단 우리 가족만이 아니다. 사직공원 일대에 사는 종로구의 여러 주민도 이렇게들 애용한다.

서울시민들에게 있어서 사직단은 가깝고, 종묘는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입장료를 내고 표를 사서 들어가는 종묘에 반해 사직공원은 문이 개방돼 있어서 밤에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걷거나 뛰면서 담 너머나 문틈으로 신단(神壇)도 구경할 수 있다.

사직단과 종묘는 태조 이성계가 건립할 때도 면적과 시설 면에서 오늘날처럼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내가 그 사실을 탐구해 본 적은 없다.

다만, 내가 1980년대 중반 서울살이를 시작 이후 지금까지 지켜본 소견에 따르면, 사직단의 神은 가깝고 종묘의 神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종묘와 사직, 임금에게 더 중요한 곳은 어디였을까. 종묘와 사직, 백성에게 더 중요한 곳을 어디였을까.

사직단을 돌아보고

목록으로 · 뱅기노자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