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속으로] (1)종묘 탐방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오늘을 걷는 것은 내일이 있기 때문

우리는 누구누구 후손으로 살아가는지도 잊고 살았다 영웅호걸 성현들의 찬란한 시간마저도 멀어져만 간다 역사의 강둑에 홀로 섰을 때 비로소 나를 다시 묻고 나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해본다

종묘는 침묵을 머금은 시공간으로 역사 품어 내었고 한 칸 한 칸마다 왕실과 선조의 혼령 서려져 있었다 차가운 기둥과 벽 사이에 스민 혼 바람 말을 건네니 조선의 혼령들이 드나드는 불멸의 성지였음을 알았다

조선은 사라졌으나 홍익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하늘과 땅 사람 사이는 천지인 삼합으로 하나 되었다 천명은 신비한 위엄이 아닌 온 백성의 울림이었으며 세종의 애민 애족은 만백성을 위한 길이었음을 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에 더 귀를 기울였으며 걷고 느낀 자리마다 흩어진 민족정신 다시 깨어났다 건물은 외형을 보는 것이 아닌 내면의 민족혼을 보자 혼(魂)구멍은 오늘날까지 이어진 살아 있는 유산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를 여는 길의 시작점으로 오늘 발걸음 하나하나는 내일을 바꾸는 씨앗이 된다 왕의 길은 죽은 역사가 아닌 살아 쉬는 미래의 길로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 바로 지금이라 말하고 있다

전주에서 시작되는 조선 왕조…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전주 이씨들

한 걸음, 한숨이 역사를 흔들었다. 왕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유적만을 둘러보는 일이 아니었다.

8월 2일 (사)신지식장학회와 전북도민일보가 주축이 된 ‘걸어서 왕의 길을 걷다’ 제1편이 서울 종묘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아카데미 1기에는 신지식장학회 회원과 우석대 윤서원학생 등 18명의 청년이 함께 걸은 이 날 탐방은 공간을 통해 오늘의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역사 여정이었다.

종묘는 서울 종로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울창한 숲과 고건축이 어우러진 풍경은 ‘조용한 충격’이다. 흙과 박석이 길을 이루고, 단아한 지붕 선이 청명한 하늘을 받든다. 기념비적인 웅장한 건축이 아닌, 조선의 정신과 미학, 자연의 사유가 살아 있는 공간이다. 검소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어쩌면 화려할 수 없었던 숨막히던 조선의 역사, 지나온 시간과 잠시 멈춰진 시간 그리고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는 장소임을 단숨에 느끼게 한다.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제례의 공간이자, 조선이라는 나라의 뿌리와 철학이 응축된 신성한 성소다. 비움과 절제의 미학으로 설계된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배치 구조 속에서 조선이 추구한 ‘조화와 절제의 나라’라는 이상이 공간으로 구현돼 있다.

이번 탐방은 종묘의 제례 공간을 통해 조선 건국 이전의 깊은 뿌리를 재조명하려는 데 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곧 가문의 정치적, 문화적 계보가 쌓여온 기나긴 여정이 있었다. 그 출발은 ‘목조(穆祖)’ 이안사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로, 전북 전주 출신이다. 전주는 조선왕실의 본향이며, 전주 이씨의 고향을 넘어서 조선의 정신과 사상이 출발한 곳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강원 삼척을 거쳐 함경도 지역으로 이주한 뒤 북방 여진과의 교섭 속에서 세력을 키웠고, 익조, 도조에 이어 이자춘(환조)이 그 기반을 계승했다.

이자춘은 원나라 간섭기에 일시적으로 원에 투항했으나, 다시 고려에 귀의함으로써 고려 무장 세력으로 복귀했고, 이후 아들 이성계를 북방 군사령관으로 성장시켜 조선 개국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종묘는 조상만을 기리는 곳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고 지켜온 ‘정신적 계보’를 모시는 곳이다. 그 속에 이안사와 이자춘의 신주가 함께 모셔진 의미는 단절이 아닌 ‘연결의 역사’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종묘는 ‘조선’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원의 부마국에서 독립하려 했던 고려 공민왕과 원 황실 출신인 노국대장공주의 신위가 봉안된 별도의 공민왕 신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개혁의 상징인 공민왕과 그 곁을 지킨 노국공주를 신당에 모신 공간 배치는, 종묘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역사적 공간임을 의미한다.

정전 내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하는 공간 작열하는 태양아래 정전과 영녕전을 돌아보며, 길게 이어진 ‘신로(神路)’를 따라 걸었다. 왕이 제례를 위해 걸었던 길이자, 신령의 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인간이 신에게 예를 다하는 상징적 통로다. 일자로 곧게 뻗은 석길 위에서 탐방단은 각자의 속도로 걸었다. 공간의 울림을 체감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겹쳐지는 시간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태어났고,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어떤 정신을 후세에 남기려 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전주에서 북방으로, 다시 한양으로 이어진 ‘왕의 길’이 있었다.

▲종묘에서 시작되는 조선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천도가 확정되면서 새로운 도읍을 건설한다.

유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건국한 조선의 도읍에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시설은 왕이 머물 궁궐과 왕실사당 종묘, 신께 제사를 지내는 사직이 있다.

종묘는 종(宗)의 묘(廟)라 했다. 왕들의 잠든 혼을 모시는 사당. 조선의 시작은 종묘와 사직단이었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궁궐에 앞서 종묘와 사직단을 지었다.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인 유교 문화의 상징이었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왕가의 제의 성전이 종묘이다.

유교는 사람이 죽은 후에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된다 생각했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에 모셨다. 종묘는 왕과 왕비들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다. 사계절의 첫날과 섣달에 다섯 차례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낸다. 종묘는 다시 크게 신주를 모시는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제를 준비하는 공간들로 나뉘어져 있다.

종묘의 조영원리에는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라는 대원칙이 있다. 각각은 종묘에서 몇 대까지 제사를 지내느냐를 나타낸다. 이에 따라 건물의 수나 신실(神室)의 수를 조정한다.

정전은 태조 때 일곱 칸으로 창건됐다. 네 개의 칸에 태조의 4대조(추존왕)까지 모셨다. 세종 때 이르러 일곱 칸이 모두 차자, 서쪽에 영녕전을 세웠다.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실 네 칸과 좌우 협실로 지어졌다.

종묘에는 세 길이 있는데 하나로 어울려 주로를 이룬다. 가운데 높은 길인 신향로는 신의 길인 신로(神路)로서 향(香)·축(祝)·폐(幣)를 들여오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길이며, 왼편은 세자의 길, 오른편은 왕의 길이다.

종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신의 길이라는 신로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하면서 발걸음을 옮겨 다녀도 가끔 신로를 침범하거나 지나가기 일쑤다. 좋은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찍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로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잠시라도 내가 신이 된 것일까?

왕실의 권위와 나라의 상징인 종묘 신로에서 잠시나마 미완의 혁명가 정여립 선생의 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진리를 묵상해본다. ▲자연과 어우러진 살아 있는 공간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종묘, 자연과 건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도심의 빽빽한 격자 속에서도 이곳은 시간의 속도를 늦추며 고요히 숨 쉰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숲과 돌, 길과 흙의 조화는 종묘를 유적으로만 느껴지지 않게 한다.건축은 화려함보다 비움을 선택했다. 중심에는 정전과 영녕전이 있으며 장식 없이 낮은 지붕선과 단정한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와와 나무, 하늘과 땅이 한 시야에 담기며 자연과 건축이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정전 앞의 월대는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채워질 듯한 깊은 울림을 전한다. 박석이 깔린 마당을 따라 걷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레 건물 중심부로 끌린다. 흙과 돌은 일부러 반듯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든다. 비 오는 날, 이곳을 걸으며 느낄 고요한 아름다움이 떠오른다.건물 배치뿐 아니라 신의길 또한 인상적이다. 좁고 긴 길은 연결 통로가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 된다. 수직보다 수평을 강조한 구조는 걷는 사람의 속도를 늦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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