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14. 전주시
김현종 · 2026-05-26 · 자유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문화를 주도하자
역사는 시작과 끝이 물리고 물려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잠시나마 숨을 쉴 콤마 없고 마침표도 없는 무한궤도다.
강물에 휩쓸려 가는 뗏목처럼 제 안위도 지키기 어렵고 쫓고 쫓기를 반복하며 앞을 볼 수도 뒤를 볼 수도 없다.
자연의 산천초목은 제철을 알아 제 할 일을 할 줄 알고 순박한 농사꾼도 농사철을 알아 씨를 뿌리고 수확한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이 철부지로 나대거나 민족지도자가 철을 몰라 헛짓만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지속적인 경제 발전도 중요 하겠지만 한발 앞서서 보고 한발 앞서나가 세계문화를 선도할 시대정신이 요구된다.
실종되어버린 민족의식을 되살리고 새역사 창조를 위한 올바른 사관으로 강둑에서 내려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보호받는 약자에서 보호하는 강자로서 역사를 주도하고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여 인류를 보호해야 할 선진국이다.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우리는 문화 국민의 명성을 살려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문화를 주도하자.
▲ 전주교육대학교 고인돌
전주교육대학교 교정에 자리잡은 고인돌. 박병춘 총장이 직접 나와 설명해 주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고 기록에도 없는 고인돌로 남방식이며 1970년대에 남고산에서 교육대학교로 옮겨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재이전했다. 자연석이 아닌 깎아낸 흔적이 있고 위쪽에는 별자리 모양이 새겨져 있다. 옮겨진 고인돌이라 부장품은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
박병춘 총장은 '대학의 계획에 따라 다시 옮겨가야할 처지에 놓여있다'며 '관련 전문교수들과 논의 유적지로써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위치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 남고산성
전주시 동서학동에 220m 높이의 남고산 정상을 중심으로 둘러쌓은 2.95㎞ 길이의 산성이 남고산성(南固山城, 사적 294호)이다. 고덕산 서북쪽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형의 석성으로 전주천 건너 동고산성과 함께 전주의 남쪽 관문을 지키는 형세이다. 남고산성은 견훤성, 고덕산성, 만경산성이라고도 불린다.
후백제 견훤이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이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점에서 이전부터 성이 수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성벽은 19세기에 수축된 것으로 1811년 관찰사 이상황이 수축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완료하고 남고진 南固鎭을 설치했다.
산성의 남쪽과 북쪽에 장대가 있으며, 문은 동쪽과 서쪽에 있고, 서쪽에는 암문이 있었다.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의 포루가 있었으며, 특히 천경대, 만경대와 같은 절벽이 자연적 요새를 이루고 있다.
현재 서문지 석축이 남아 있고 남고사와 관성묘를 비롯하여 남고진의 내력을 기록한 '남고진 사적비'가 있다. 남고산성 고지도에 보면 산성안에 종이를 뜨는 지소도 있었다. 남고산성 서문 바로옆에 남고진사적비가 있다. 남고산성의 수축경위와 남고진 南固鎭 설치에 대하여 기록한 것으로 1846년(헌종 12년)에 세워졌으며, 최영일 崔英一이 글을 짓고, 명필 이삼만 李三晩이 글씨를 썼다.
서문에서 산성을 따라 우편(남고진사적비 반대편)으로 조금 오르면 만경대이다. 만경대는 고려말의 수절신 정몽주의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380년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고 귀경길에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에 들려 오목대에서 일가친지를 불러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여기에서 술이 거나해진 이성계가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 大風歌를 읊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종사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고 한다. 남고산성 만경대 바위에 정몽주가 읊었다는 이 시가 새겨져 있다.
▲ 남고사
전주부성 주변에 동고사ㆍ서고사ㆍ남고사ㆍ북고사 등의 사찰이 있어서 성의 사방을 수호했다. 남고사 南固寺는 남고산성 서문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8년 (668)에 명덕화상 明德和尙이 창건하였으며, 남고연국사 南固燕國寺라 불리다가 조선 성종대 이후 남고사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다. 다만 당시의 한자 이름은, 남고사 南固寺가 아니라 남고사 南高寺였다. 명덕화상은 열반종조 涅槃宗祖 보덕대사 普德大師의 수제자이다. 지도에 보면 남고사 위에 칠성각이 보인다. 남고사에서 해질녁 낙조를 바라보며 듣는 남고사의 저녁 종소리 남고모종 南固暮鐘이 전주 8경의 하나로 꼽힌다.
▲ 전주 한옥마을
700여 채의 한옥이 집적된 전주 한옥마을은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유일한 도심 최대의 한옥군이다. 또한 경기전과 전동성당, 전주향교 등 전주의 대표적인 유 · 무형의 역사자원이 집약된 곳으로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은 도시한옥의 특성을 지닌 건축물과 골목길이 양호하게 보존돼 있다. 오목대에서의 조망경관이 우수하며 경기전, 풍남문, 전동성당 등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의 70% 이상이 집중돼 있다.
또한 최명희문학관, 완판본문화관, 전주전통술박물관, 대사습청, 부채문화관, 전통문화연수원 등 주요 문화시설의 70% 이상이 인근에 위치해 있는 것은 물론 주변 남부시장(야시장 먹거리), 자만벽화마을, 동문예술거리 등 즐길 거리도 많아 도시관광의 최적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함께 전통한옥 숙박체험 및 비빔밥, 한지공예, 수공예, 판소리 등 전주의 특색있는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으며 전주비빔밥축제와 세계소리축제 등 가장 한국적 축제가 계절별로 개최돼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 풍남문
이 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문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지만, 이후 정유재란과 화재로 불타버렸다.
그 후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락인 洪樂仁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했는데, 풍남이란 풍패 豊沛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 한 漢 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곳에 비유한 것이다. 성문 위에 세운 누각의 기둥이 아래층에서부터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 전동성당
조선 정조 8년(1784) 이승훈 李承薰이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천주교를 한국에 들어온 다음해 이승훈으로부터 전교받은 유항검 柳恒儉이 호남지방의 포교 책임자가 됨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일찍 포교되었다.
1701년(정조 15년)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토마스) 그리고 순조 원년(1801)에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 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됐다. 이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908년 프랑스 신부 보두네(Baudounet)가 성당 건립에 착수, 1931년에 완공했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건물은 인접한 풍남문ㆍ경기전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순교 1번지인 이곳은 유항검의 큰며느리인 동정녀 이순이(루갈다)가 순교한 숲정이 성당, 유항검 등이 묻히 인근의 치명자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천주교 순례지이다.
▲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건국자의 초상이며, 경기전 또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방의 진전이다. 전주는 조선왕실의 본향으로 태조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다.
조선은 건국 후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년)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경기전은 1614년(광해군 6년)에 중건한 것이다. 서편의 경기전 부속건물들은 1919년에 철거되어 2004년에 복원하였다. 경기전 경내에는 진전 동편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고, 구이 태실마을에서 옮겨온 예종대왕 태실이 있다.
경기전 북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