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12. 익산시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왜곡된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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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올바른 사관 史觀을 가지기 위해서 역사를 배우고 고대사부터 근대사는 물론 세계사까지 다양하게 섭렵한다.

시대별 역대 왕조를 외우며 수탈의 역사와 인물을 논하고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의 변천사를 논할 만큼 박학다식하다.

​역사는 교과시험을 위해 암기하는 일회성 학문이 아니고 역사 왜곡과 역사 치매로 관념화되어가는 대상도 아니다.

사회가 역사교실이고 우리가 함께 숨을 쉬는 삶의 현장이 민족의 역사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다.

​역사를 바르게 보는 데는 세 가지 인식론적 방법이 있다. 첫째 공간적사관 인식은 역사에 따른 방향 감각성을 찾고

둘째 시간적사관의 바른 이해로 역사 균형감을 유지한다. 셋째 편파적인 주관가치를 객관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방향감각과 사관의 균형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역사는 민족자존의 주체성 상실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공간 밖으로 나가 공간을 보고 시간 밖으로 나가서 보자. 보는 안목을 수립하고 바른 가치관으로 역사를 경영하자.

​ ▲ 미륵사지

​익산지역 탐방은 학예사 공무원으로 청춘을 미륵사지 연구에 바친 노기환 학예연구사의 해설로 이어졌다.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 2년에 창건한 사찰의 터이다. 미륵사지는 1974년과 1980년부터 1996년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때는 중앙에 목탑과 법당 동쪽과 서쪽에 석탑과 법당을 두고 회랑으로 공간을 구분한 3탑 3금당 사찰로 확인됐다. 대규모 승방과 거대한 강당을 배치한 형식으로 사찰의 규모와 웅장함을 보는듯 했다. 당시에는 백제 장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퇴락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폐사되고 말았다. 현재는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었는데 일제시기 시멘트를 이용하여 서탑을 복원했다.

​복원 재료로 사용했던 시멘트는 오늘날 첨단소재인 반도체와 비견할만하다 하니 일제도 석탑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정부가 4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을 펼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9년 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어 미륵사지의 진정성을 높여주었다.

​동 · 서 양탑이 아름답게 복원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높이 40m에 달하는 9층 목탑이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립익산박물관에 미륵사지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된 1만9천여점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은 백제 말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서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됐다.

또한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돼 일정기간 사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무왕이 천도를 하였거나 후백제의 견훤이 도읍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사적 제408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백제 무왕때 조성된 왕궁터로 6만6천평에 달하는 면적에 궁성관련 유구, 보물인 왕궁리 5층석탑과 궁터, 성곽, 공방지에서 토기, 기와, 금제, 유리 등 1만여점이 발굴되었다.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 등으로 불리며 뭔가 중요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무왕 대에 궁궐로 사용되었으나, 신라후대에 사찰로 용도가 바뀌었다가 다시 세월이 지나 사찰도 폐사되고 폐허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근처의 미륵사와 제석사지, 익산토성, 미륵산성, 낭산산성, 천호산성, 금마 도토성, 쌍릉 등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 왕궁이 유력하다는 주장이 학계에 확산되고 있다.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백제왕궁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며, 백제 문화와 백제인들의 삶을 느껴볼 수 있는 백제 역사의 대표 관광지다. 아울러 왕궁리유적은 봄에는 벚꽃이 만발한 시기에 가족들이 사진을 찍고 산책하기에는 최상의 장소이다.

또한 커플들을 위한 포토 스팟이 조성돼 있어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5층석탑을 배경으로 다양하고 아름다운 사진을 남기기에는 최적의 관광지다.

이와 함께 문화재 야행, 백제왕궁 달빛 공연, 소원등 날리기체험, 천년별밤 캠프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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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세배놀이

​기세배놀이는 마한시대 농민놀이로 전래되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금마면에서 서열을 맺은 마을 사이에 농기로 세배를 올리며 질서와 화합을 도모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원래는 12개 마을이 참가했었는데 현재는 6개 마을로 축소되어 진행되고 있다. 익산기세배보존회에서 기와 풍물놀이로 숭농의례 행사를 하고 상호 친목과 협동심을 고취시키는 놀이로 보존 시연하고 있다. 보존회 강당에서 서툴지만 가무에 능한 한민족의 후예답게 풍물을 울리며 한바탕 흥을 돋우었다

​ "가무에 능한 한민족의 후예답게 풍물을 울리며 한바탕 흥을 돋우었다. "

▲ 망모당

​망모당은 선조 38년(1605)에 부친을 여읜 표옹 송영구가 조상들을 추모하며 지은 누각이다. 팔작지붕의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전북유형문화재 제 90호이다. 현판은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주지번이 쓴 글씨라 한다. 표옹이 정철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갔을 때 과거를 준비하던 주지번에게 답안작성 요령과 책, 경비 등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그전까지 번번이 낙방하던 주지번이 결국 장원급제하여 승승장구하며 은인을 잊지 못하다 사신으로 왔을 때 고마움을 표했을 것이다. 전주객사에 풍패지관이란 글씨와 명륜당의 편액 등 여러 곳에 글씨를 남겼다는데 거리와 시간상 실제 검증이 필요해 보인다. 주지번은 허균 등과 교류하며 허균의 누이 허초희가 쓴 난설헌집을 읽고 감탄하여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승기

미륵사지는 조상님들의 위대한 유산이다. 동탑과 서탑 복원을 위해 20여 년 한길만 달려온 노기환 학예사께 감사를 드린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든 자장율사처럼 다보탑을 만든 백제의 혼으로 학예사는 탑에 지극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미륵은 새 시대를 열고픈 국민의 간절한 열망이다. 원광의 점찰법회, 부설 거사, 통장 법사, 부사의 방에서 진표율사의 미륵불 친견은 8간자, 9간자로 하여금 금산사를 중창케 하였고, 법주사, 동화사를 창건하며 미륵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새 바람을 열망했던 정여립 선생, 실학의 유형원 선생, 민주주의 혁명서격인 홍길동전을 저술한 허균 선생, 동학의 전봉준 장군은 역사의 미륵 등대지기였다.

박창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기자의 40세손인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망명하여 한왕이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194년의 일이다. 사기 조선서, 후한서에는 준왕이 마한을 쳐 한왕이 되어 삼한을 지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역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세종실록, 동사강목 등 일부 기록에 준왕이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금마라 하였다. 금강줄기를 거슬러 군산 나포에서 배를 내려 이동한 곳이 익산이었을 것이다. 세 아들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 태봉사에 준왕의 흔적이 있고 후손의 성도 기씨, 한씨, 선우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학설이 있다. 은나라 멸망 후 일개 망명객인 기자가 종선왕거 하였을지언정 세력도 없이 고조선을 이어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쪽 고죽국이 있던 난하 모퉁이, 또는 대능하 인근에 웅거하며 작은 세력을 형성하여 이어오다가 준왕에 이르러 쫓겨났지만 후사도 없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마도 마한의 세력과 기존의 토착민, 진지망인 秦之亡人들이 얽혀 54개의 군소 집단이 세력다툼을 하였으니 언제 어디서 사라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간직하였던 문화와 앞선 문물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주원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서 발견된 미륵사지.

몇 해 전보다 훨씬 잘 정돈되어 있었고 박물관에는 발굴된 자료의 양이 많았다.

미륵사지 발굴 초창기부터 헌신해 온 학예사님의 설명은 발굴된 자료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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