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11. 완주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웅치 전투! 최후의 결사대 곰티재에서 조선을 구하다.
사군이충 事君以忠은 나라에 충성을 다해 섬기는 것으로 충도 忠道는 국민의 도리를 아는 백성의 바른 지성이다.
충심 忠心은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의 뜻 깊은 감성으로 한결같이 역사의 중심과 국민의 중심을 잡는 애국심이다.
충행 忠行은 국위를 선양하려는 강한 국민의 의지력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으로 나라를 지키는 건강한 정신력이다.
역사경영의 주인으로 항상 국가에 공헌하려 노력을 하고 스스로 나라 지킴이가 되어 솔선수범하는 국민적 행위다.
목숨으로 국가를 지키는 것도 나라 안에 가족이 있으며 국가도 우리를 굳건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였기 때문이다.
조국의 명예와 역사 민족의 국가 경쟁력을 드높여 보자. 여기가 역사의 현장이었고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아직도 민족의 역사적 아픔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채 송아지를 지키려는 암소가 호랑이를 들이받는 심정으로
자식을 위해서라면 대신해 죽을 수도 있는 부모님처럼 목숨 바쳐 지켜야 할 조국이 있기에 역사 속으로 간다.
▲ 웅치전적지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 한창 흥행하고 웅치전투 431주기 기념식이 열리던 시기에 웅치전적지를 찾았다. '한산'은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치러졌던 세계 해전사중 최고로 꼽히는 한산대첩을 그려 내면서 웅치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무주, 금산, 진안 등지에 집결한 왜군은 전주부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를 지나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웅치를 넘어왔고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지키고 이복남이 그 뒤를, 정담은 정상에서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여 방어했다. 왜군이 막대한 전력 손실에도 수적 우세로 웅치고개를 넘어 안덕원까지 진출했으나 소양평 일원에서 황진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지속적인 타격으로 격파 당하면서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물러났다.
임진왜란중 육상 전투에서 최초의 승전으로 평가 받으며 재조명해야한다는 여론을 업고 무거우면서도 승전보를 전하는 탐방의 발걸음이었다. 술 한잔을 따르며 전장에서 작렬하게 숨져간 영령들을 추모한다.
▲ 위봉산성
변란에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시켜 보호하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원년(1675)~숙종 8년(1682)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 둘레는 약 8.6Km, 성벽 높이는 1.8~2.6m이고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지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지 2개소, 포루지 13개소,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벽 및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다른 산성과는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송광사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景文王 때 도의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백련사 白蓮寺였는데 규모가 매우 커서 일주문이 3㎞나 떨어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황폐해져 폐찰이 되었다가 1622년(광해군 14년)부터 승려 응호 · 운쟁 · 덕림 · 득정 · 홍신 등이 다시 세우기 시작해 14년 만인 1636년(인조 14년) 완공되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 一字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연출한다. 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1243), 종루(보물 1244),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보물 1255), 소조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274), 일주문(전북유형문화재 4), 사적비(전북유형문화재 5), 동종(銅鐘:전북유형문화재 138), 나한전(전북유형문화재 172), 금강문(전북유형문화재 173), 벽암당부도(碧巖堂浮屠:전북문화재자료 144) 등이 있다.
▲ 상운리 고분군
상운리 고분군은 용진읍 상운리 산 8-1에 위치한 마한~백제시대 고분군으로 현재 한국도로공사 소유이며 고속도로에 인접한 진입로를 통해 탐방이 이뤄졌다.
우리나라 마한 분구묘 최고 밀집 및 최대 유적으로 확인되었으며 마한 분구묘의 계기적인 발전단계, 사회적 위계관계, 마한과 백제의 사회 · 정치적 관계를 보여준다는 장기재 완주군 학예사의 설명이다.
백승기
곰티댁! 곰티댁! 사랑하는 어머니 김분임 여사의 별명은 곰티댁 이었다. 친정이 완주군 소양면 신촌 두목리 곰티재 마을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에 고모부들께서 그렇게 불렀다. 곰티는 웅치의 또 다른 별칭으로 오래전부터 곰티라 불렀다. 진안과 완주의 경계에 있는 웅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당시 전주성 사수를 위한 요충지였으며 6, 25 때는 밤마다 빨치산들이 산에서 내려와 양민들을 학살 했었다고 한다. 1950년 7살 어머니의 기억으로 6.25의 참상을 들으며 웅치전투에서 산화한 조상님들의 숭고한 충의와 애국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박창보
웅치전투는 승리한 전투이다. 왜군이 한산에서의 해전과 더불어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전주성 점령을 위한 육전을 전개한다. 1592년 7월 8일(음)의 일이다. 1만여 왜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웅치(곰티재)를 조선관군과 의병 1천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1차와 2차 저지선이 무너지고 3차도 포기할 즈음 조선군 장수 정담을 비롯해 모두 전사하였고 이복남과 황박은 후퇴하여 남원에서 합류한 황진과 더불어 곧이은 안덕원전투에서 승리한다. 전력의 약화로 전주성 점령에 실패한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묻으며 조조선국충간의담 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의 충성과 의로움에 조의를 표함)이라 써놓고 금산으로 후퇴하였다. 왜장이었지만 중과부족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운 조선군에게 감복하여 예를 갖추었으리라. 결국 전라도가 보존됨으로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김주원
완주는 너른 땅에 전주를 안고 있어 역사적으로 전주와 밀접할 것이다. 소양면 송광사를 지나쳐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면 고갯길 정상쯤에 위봉산성이 나타난다. 한 때 전주가 동학 농민군에게 함낙 되었을 때 경기전에 모셔 두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위패를 옮겨 오기도 했던 군사시설이다. 이곳은 BTS화보 촬영지로 이미 유명해졌다. 또한 한국관광공사에서 '2022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으로 위봉폭포, 위봉사와 함께 선정하기도 했다. 위봉산성길은 약 8.6km로 단풍이 예쁜 계절에 간단한 배낭을 메고 한바퀴 산책하듯 걷는다면 역사 향내나는 길을 걷는 힐링의 시간이 되겠다.
강승균 송광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순천에도 있다. 광해군의 동생인 의창군이 두 곳 현판을 썼다고 한다. 두 절의 유사점이 많다. 대학시설 자주 가보았던 송광사의 이미지는 다소 낡고 초라한 모습이었으나 몇 십 년 만에 방문한 이곳은 주변 전각이 들어서 있어 다소 웅장한 모습이다.
주변 환경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나 보다. 종각은 ╂ 모양이다. 십자가 모양 보다는 卍 모양이다. 12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2층 누각형태를 갖춘 건물로서 고건축물 중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 라고 한다. 송광사는 보물들이 많아 완주군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임금녀
송광사의 불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 불상이다. 대웅보전 안쪽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법당 안에 있는 좌불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며, 불상 각 부분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 후기 불상 중 우수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불상은 석가여래의 화현이라 여겨지던 진묵 스님이 점안 點眼한 것이라고 한다. 불상 복장에서는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두 왕세자의 무사 귀국을 비는 발원문이 나왔다고 한다. 송광사는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산문이 매우 정연하게 되어 있다. 이 절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산속이 아닌 평지에 조성한 사찰이라는 것이다.
김영미
웅치전투지역인 곰티재에 오르니 왜군에 맞서 목숨바쳐 싸웠던 선열들의 숭고한 죽음과 구불구불한 옛길을 힘겹게 오르내렸을 조상들의 애환에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진다. 방치된 옛길을 있는 그대로 둘레길로 조성해 많은 이들이 두 발로 걸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