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09. 장수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주논개 의사로 추앙하고 국가가 넋 기리고 선양해야

​촉석루 주 논개 의사의 넋이여!

​반만년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의 민족정신과 전통문화는 마음을 씨앗으로 영글게하고 사람마다 싹을 트게 하였다.

마음씨 말씨를 담아 다듬어 보내는 글은 글씨로 다듬고 손놀림 몸 매무새는 솜씨 맵씨로 다듬어 서로 어울렸다.

​가슴마다 혼불 담아 역사를 지켜온 배달겨레의 불씨들 불 끄러 온 자들로부터 역사 불씨를 목숨 태워 지켰다.

조상님들 예지를 씨앗으로 싹틔워 살았던 의병의 충절 밀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주논개 의사의 넋이여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국민이 일어났던 역사 현장에 나라를 지키는 일이 누가 시킨다고 할 일이었겠는가?

어떠한 보상이나 댓가를 바라지 않고 나섰던 의병들 자칭 의사가 되고 열사가 된 민족의 충의 선열이시다.

​개인이기 집단이기에 자유롭지 못한 질곡의 역사현장 배달겨레 역사경영이 어찌 공직자들만의 몫 이겠는가?

찬 서리 초야에도 짓 밟히지 않고 되살아난 들풀 들꽃! 모두가 역사 현장이고 우리모두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 ▲ 논개 생가와 논개사당(의암사)

임진왜란때 순국한 주논개의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를 조성하면서 마을 전체가 수몰되자 현재의 위치인 장계면 의암로에 복원했다. 의암 주논개 생가지에는 기념관, 단아정, 의랑루, 주논개비, 최경회비, 주논개 부모묘 등이 있다.

주논개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사당인 의암사는 장수읍에 위치해 있으며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이다.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논개의 충절을 선양하기위해 논개생장향수명비를 건립하고 1955년 남산에 사당을 세운후 1974년 현 위치로 옮겼다. 매년 음력 9월 3일 제례행사를 열고 있다.

애국과 충절의 주논개의 역사적 의미와 충절 정신이 너무 가려지고 빛을 보지못한다는 느낌이다.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처럼 마땅히 '주논개 의사'로 추앙하고 이제는 국가가 기리고 선양해야 하지 않을까?

일행은 장수 기획탐방에 동참한 박용근의원(전라북도)과 함께 논개를 기리며 술 한잔을 따라 올렸다. 이선녀 시조시인의 시조로 논개님을 추모한다.

▲ 장수 삼봉리 · 동촌리 고분군

장수 삼봉리의 고분군은 금강의 상류쪽 장계분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트럭을 동원해 도굴했다는 증언은 이곳에서도 들린다. 이곳저곳 훼손된 고분을 둘러보며 울분과 탄식을 한다. 다행스럽게 토기류, 철제무기류도 발굴됨으로서 가야계의 지배계층 묘역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다.

조금 낮은 지대에는 한단계 아래로 짐작되는 계층이 묻혀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창 발굴중에 있다. 동촌리 고분군 역시 도굴로 훼손된 모습이다. 30호분은 철제마구가 발굴되었고 규모와 위치로 보아 이 지역의 수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설사에 의하면 봉수대와 철을 제련하던 터의 슬러지들이 다수 발견된다고 한다.

아쉽게도 연대측정이 제대로 되지않아 조선시대의 유물로 알려진 곳도 있다. 전남북과 충청 일부가 가야의 강역이었다면 백제는 생각보다 매우 위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륙백제설은 남제서, 양서, 송서, 구당서, 신당서, 만주원류고 등의 사서에서 보듯이 요서를 지나 산동과 양자강 남부, 한반도의 서쪽과 왜를 지배한 국가로 중앙집권보다는 지역별 담로들과 호족과의 연맹체였을 것이다. 오늘날 전북의 가야 유적 또한 주변의 교류와 합종연횡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아닐까?

문제는 일부 학계에서 장수를 반파국이라 하는데 일본서기에 실린 임나일본부의 여러 소국 중 하나로 고령의 대가야를 지칭했었다. 반파의 지배층이 고령에서 장수로 이동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근거가 희박하다. 500여년의 존속기간을 유지하다 6세기 중엽에 망한 가야와 8세기 초에 건국한 일본과의 시대적 격차를 무시하고 일본이 지배했다는 논리는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건국후 20여년이 흐른 뒤 쓰여진 일본서기는 삼국시대에 비해 열등한 현실을 조작, 왜곡한 소설로 당시의 여러 사서를 베껴쓰며 연대와 사건이 뒤죽박죽이 된 위서이다. 일본의 역사 조작과 왜곡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 ▲ 장계 고인돌

​장계면 논 한가운데 외롭게 방치된 고인돌을 보며 우리의 역사의식에 대한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논개사당 의암사에 들렀는데 입구의 너른 잔디밭 가운데에도 고인돌로 추정되는 큰 바위가 한갖 장식물로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 백승기

기생이면 어떻고 첩이면 어떠한가? 나라를 위한 구국충절에 상하가 어디 있고 귀천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꺼져가는 민족 혼의 불씨를 되살리려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 촉석루 절벽에서 밀알이 되어 산화한 고귀한 여인의 숭고한 영혼 앞에 우리 일행은 술 한잔을 올리고 삼배를 드렸다. 가락지의 위대함은 여인의 가녀린 손가락 마디마디에 장명등이 되어 다시 태어났다.

조선 여인의 기개를 보여준 주 논개의사는 애국 충절 의사로서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당 한 칸에 모셔져 있다.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를 높여 부르듯 국가는 주논개의 호칭을 논의하고 신속히 '의사'의 반열에 올려야 할 것이다.

​ 박창보

임진왜란 당시 진주 촉석루에서 일본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한 주논개를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그녀는 의병장 남편 최경회의 죽음과 나라를 침략한 원수를 몸바쳐 응징한 의사였다.

논개생가마을을 방문하여 그녀의 발자취를 기리며 옷깃을 가다듬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기생이 아니었고 위장을 하여 적장에게 접근하였다는 사실과, 깍지가 풀리지 않도록 손가락마다 반지를 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행들과 더불어 의사로 추존하자는 의견에 공감한다.

김주원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고인돌군은 청동기 문화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유적으로 고창고인돌군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이다. 고인돌이 강가 ·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하나 장수 삼봉리처럼 내륙지방에도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이어 삼봉리 가야고분을 탐방하였는데 봉분이 넓고 높으며 끝이 뾰족한 모양으로 높은 신분의 묘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촌리 가야고분군은 야트막한 산능선 초입에서 발견되었는데 역사성이 부족한 나로서는 특이하지 않은 산능선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해설사의 설명으로는 장수군은 금강 최상류로 가야국이 4세기 말엽에 등장 하고 백제에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6세기 초까지 가야 문명의 꽃을 피웠던 곳이라 한다.

전북 7개 시 · 군에서 크고 작은 가야 문화 유적지가 발견되고 발굴됨으로써 전북은 백제문화권였을 것이란 통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가야 문화를 꽃피운 역사가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 신동만

장수는 전북의 지붕 진안고원의 동쪽에 위치한다. 남덕유산, 장안산, 팔봉산, 백운산, 시루봉, 깃대봉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로 둘러쌓인 고원분지다. 삼봉리 들판 논 가운데 있는 고인돌을 보면 장수읍과 장계면에 넓게 형성된 분지를 중심으로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살기 좋은 터이다. 사국시대 소백산맥의 철광석을 이용하여 철의 제국을 열었던 가야의 유적이 지천에 널려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장수는 사과와 한우가 유명한 두메산골의 그저 아름다운 생태지역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충열의사 주논개가 있었다. 조선의 여인 중에 충과 열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이가 장수 인물이었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장수는 의외로 고분들이 많다. 규모가 장대하며 비록 도굴되어 부장품의 대부분은 볼 수 없었지만 왕릉급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봉화로의 중심지 또한 장수인 것을 보면 고대 사국시대 가야의 소왕국이 있었던 터가 분명하다. 왕릉과 산성과 수많은 제철 가마터 분명 소왕국의 도읍터이다. 그럼, 분명 도시구조가 존재한다. 왕궁과 신앙유적과 왕릉과 성곽이 있어야한다. 지금 당장 체계적인 조사와 발굴과 합리적인 복원이 필요한 때이다. 장수의 자부심과 긍지는 고려, 조선시대의 현읍이 아니라 가야의 왕도다.

​ 윤재민

사과가 유명하고 금강의 발원지로만

목록으로 · 뱅기노자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