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06. 김제시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상대를 용서하고 포용하는 ‘우리’가 있었다.

수입종교의 공생으로 유·불·선 삼교가 공존하는 시대가 있었다. 관료는 유교를 왕실과 백성은 불교를 은둔 수행자들은 도교를

유불선 儒佛仙은 인 人을 변으로 사람중심 문화에 뿌리내리고 천지인 天地人 고유정신에 막힘이 없어 함께 공존할 수 있었다.

불교수행은 생사가 둘이 아닌 경지로 윤회로부터 해탈함이고 유교는 윤리도덕의 근본 도학으로 근본 이 理, 변용 기 氣를

논리적으로 이기이원론 인지와 이기일원론 인지를 터득함이었고 선교는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되어 무병장수 비결을 터득함이다.

불교는 도통하기 위해 출가로서 세속과의 인연이 단절되었고 유교는 인의예지신 인성론에 치우쳐 생활 과학에서 멀어졌다.

선교는 수행체득으로 개인에 치우치는 단점을 감수해야 했고교회는 교회안에 교회를 세움으로서 토속신앙과 멀어져 갔다.

불교사찰 · 유교서원 · 선교수련은 서로 수행 방편은 다르지만 삼교를 믿는 이들의 집안에 신앙은 달라도 가족은 하나였다.

숭유억불에서도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 정신문화가 대립 속에서도 상대를 용서하고 포용하는 '우리' 때문이었다.

▲ 심포 망해사 ​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만경강 하류에 위치한 망해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 부설거사 浮雪居士가 창건(경덕왕 13년(754) 법사 통장 通藏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음) 수도했다. 이후 중국 당나라 승려 중도법사가 중창했으며 조선시대인 1589년 진묵대사가 망해사 낙서전을 증수했다. 평면이 ㄱ자형으로 건물 한 켠에는 마루를 놓고 그 위에 종을 걸었다. 다른켠에는 방과 부엌이 있어 건물이 법당 겸 스님의 거처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33년에는 김정희 화상이 보광전과 칠성각을 증수했다.

낙서전 창건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팽나무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사찰의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 성덕면 고현리와 부설거사

​망해사 창건 스님으로 알려진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마을이다.

백제 의자왕 10년(650) 무렵 이 마을에 사는 구무원이라는 불교신자가 늦게 묘화라는 딸을 낳았는데 말을 못하고 모든 혼인을 거절했다. 마침 부설스님이 마을을 지나다 묘화낭자의 말문을 트이게하는 인연이 되어 혼인을 하고 고현리에서 살게 되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남매가 장성하자 병에 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바다가 보이는 현재의 망해사를 지었다 한다.

또한 아들 등운은 계룡산 등운암에서, 딸 월명은 부안 월명암에서 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부설거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마을 경로당 입구 안내판에만 존재하고 있어 아쉬움으로 남았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나지막한 산 아래 대나무 숲과 함께 여러 돌맹이들 사이에 토기 파편이 흩어져 있어 부설거사가 살았을 집터로 가늠해 보았다.

▲ 탄허스님 탄생지 만경읍 대동리

탄허스님 탄생지는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이다. 탄허스님은 유불선 및 주역 등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은 현대 한국불교의 큰 스님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1913년에 탄생하여 22세인 1934년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스님의 스승은 당대 최고의 선승인 한암스님이었다. 월정사를 중건하고 화엄경 등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도쿄대와 국립타이완대학 등에서 특강을 통해 세계적인 석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1983년 71세에 열반 하셨다. 탄허스님은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6.25전쟁, 울진ㆍ삼척지구 공비침투, 박정희 시해, 12.12사태, 남북통일, 일본의 수몰, 핵폭발, 지축의 정립 등 수 많은 예언을 했다. 서예도 경지에 이르러 전국에 많은 사찰에 스님의 글씨가 남아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 미즈노씨의 트리하우스

​300년은 넘음직한 느티나무와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갈참나무 사이에 자리잡은 멋진 나무집이다.

국제결혼으로 본가인 북해도에서 살다가 처가인 김제에 들어와 폐가를 구입하여 하나씩 고쳐가며 살다 5남매의 놀이터로 만든 트리하우스다. 살림집도 각 방마다 특색있는 인테리어와 아이디로 재창조하여 멋진 다실이 되어 손님을 맞이한다. 오직 나무만으로 자녀들의 상상과 모험과 휴식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연인원 2만명이 넘는, 성수기에는 월 3천여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50여차례 공중파 방송과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전국에서 밀려오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2019년부터 큰 딸을 대표로 카페를 열었다.

찾는 고객층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양하다. 아이들의 호기심, 어른들의 추억과 동심을 두루 잡은 김제의 특색있는 관광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 일제 수탈의 현장 아리랑문학마을

​아리랑 문학마을은 죽산면에 자리하며 일제 수탈의 수난과 투쟁의 현장을 재현한 곳이다. 조정래작가의 소설 아리랑을 스토리텔링하여 '걸어서 역사 속으로' 자문단인 백승기 도시공학박사가 설계에 참여한 마을이어서 더욱 정감있고 감춰진 설명이 이어졌다.

소설의 발원지(내촌 · 외리마을) 등장인물의 가옥, 근대수탈기관, 일제수탈관, 이민자 가옥, 하얼빈 역사 등이 그 시절을 대변하고 있다.

​ ▲ 벽골제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노린다

김제벽골제는 밀양수산제, 제천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저수지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었고, 규모가 가장 큰 저수지다. 현재는 약 3km의 제방과 수문 두 개가 남아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서기 330)때 처음 축조되었고,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차례 보수공사를 거쳤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저수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운암제 완공으로 제방의 가운데를 파서 농업용수로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현재와 같이 양쪽으로 나뉜 제방과 수문 두 개가 남아 있다. 과거 벽골제의 규모를 기록을 통해 보면 약 3km의 제방을 인위적으로 쌓고 5개의 수문을 만들었다.

이 5개의 수문을 이용하여 김제뿐 아니라 인근의 정읍, 부안까지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저수지의 둘레는 자연구릉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기록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데 김제 곳곳에는 접주, 강정 등 물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고, 벽골제가 만수위가 되었을 때 이곳으로부터 약 10km 정도 떨어진 황산 정상에서 벽골제의 물로 손을 씻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히 큰 면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제시는 벽골제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고 있으며 벽골제 축소 복원을 목표로 용수로 이설공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 "과거 5개의 수문을 이용하여 김제뿐 아니라 인근의 정읍, 부안까지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 미륵의 도량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 (남북국시대)때 진표율사가 낡은 사찰을 대규모로 고쳐 지은 이후 만물의 궁극적 실체는 마음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제각기 다르게 나타난 것뿐이라는 유식 사상을 펼친 유가 종찰과 미륵 신앙의 성지로 명성을 구축했다. 또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아들 신검과의 불화로 인해 유폐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산사는 진표율사에 이어 고려 문종 33년(1079) 혜덕왕사 소현이 다시 한번 대규모로 고쳐 지은 다음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불상을 모신 대사구, 경전의 판각과 편찬, 강의를 담당하는 광교원, 대중 스님이 거주하는 봉천원을 갖춘 금산사는 대사찰로 새롭게 탄생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 역사상 불보, 법보, 승보 등의 삼보를 모두 갖춘 사찰의 원형이 되었다. 문화재는 국보 1점, 보물 10점, 등록문화재 1점, 지방문화재 1점을 소유하고 있으며, 역사와 문화, 사상적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백승기

김제 성덕면 고현마을 단골네로 추정되는 구무원의 집에 신라의 수행승 영조, 영희, 부설스님이 오셨다. 유학을 포기하고 속세와 인연을 맺게 되는 부설스님과 벙어리 묘화낭자의 신명나는 러브스토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대고 있다. 설화는 삼세의 연을 위해 20년을 기다린 벙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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