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05. 순창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역사배경을 알면 미래가 보인다.

​고려는 막강한 징기스칸의 대역사와 맞물린 비운으로 강화도로 피신 38년 만에 스스로 고려성을 무너뜨리고

왕자들을 볼모로 보내며 굴욕의 부마국으로 떨어졌다. 원의 부마국 7대에 이른 공민왕은 역사 독립을 위해

북방의 호족세력인 이자춘과 이성계를 끌어 들였다. 원나라의 쇠퇴와 함께 신흥 왕국인 명이 부흥하면서

고려는 기로에 놓이게 되고 이성계는 명을 선택했다. 조선의 재건을 주도했던 태조 이성계와 아들 방원은

이어지는 중국사로부터 한 민족사를 지키려 악역을 맡으며 민족문화 한글시대 세종의 토대를 만들었다.

​시간은 흐르고 세월을 경영하는 이들에 의해 역사가 이루어지기에 미래를 도모하려면 역사를 알아야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목적지를 아는 자가 되어야 우리의 진로를 설정할 수 있다.

역사 배경의 올바른 시대정신이 미래 창조의 열쇠다.

​ ▲ 만일사

​ "순창이 물과 함께 안개 일수 등 기후와 재료가 고추장 발효에 최적이기 때문에 순창고추장이라는 명품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에 자리한 만일사.

백제시기에 창건(백제시대 384년(침류왕 1년)이라는 설과 삼국통일 후 673년(문무왕 13년)이라는 설이 있으나 백제 때 창건으로 연구 발표됨) 되어 후일 무학대사(1327~1405)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돕기 위해 만일동안 기도를 한데서 만일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만일이라면 근 30년인데 어떤 상징과 은유라 할지라도 너무 과장되었다는 추론이다.

​사찰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 두 번의 왜란과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니 3번의 수난을 겪고도 매번 중건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일사는 많은 역사적 아픔을 겪어야 했으나 빼어난 산세로 많은 고승들이 찾아들고 배출되었다.

현재는 비구니 한 분이 사찰을 지키고 있으니 양의 기운을 중화시키기에는 모자람이 크지 않을까. 만일사 옆쪽 건물에 순창고추장 시원지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고 무학대사를 만나는 동안 점심을 먹으며 맛본 고추장이 꿀맛 같았다. 이후 왕에 오른 후 고추장 비빔밥의 맛을 잊지 못해 이후 순창고추장을 진상하도록 해 더 유명해졌다.

순창이 물과 함께 안개 일수 등 기후와 재료가 고추장 발효에 최적이기 때문에 순창고추장이라는 명품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 회문산과 무학바위

​회문산은 순창의 명산으로 문필봉을 가운데 두고 물길이 감아 돌아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문이 있어 글월문(文)이 아닌 문문(門)자를 쓰기도 한다. 풍수지리학상 양의 기운이 강해 음의 기운이 강한 모악산과 더불어 쌍을 이룬다. 산세가 다섯의 신선이 바둑을 두며 훈수하는 모양을 닮았단다. 갱정유도의 발상지이자 동학과 항일, 한국전쟁 중에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다. 산 중간쯤에 무학바위가 있다. 이성계의 멘토인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바위에 걸터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무학바위를 소개하는 푯말에는 회문산의 산세를 논했다는 전설로 기록되었으나 아마도 고심하며 망설이는 이성계에게 최종적으로 국가 창업의 결심을 하도록 부추기지 않았을까?

​ ▲ 대모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142호로 마한시대에 축조했다는 대모산성. 백제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물이 출토 되었으며 주로 군량을 비축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처음 산성의 터를 닦아 도실군 道實郡의 행정관청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말 구애를 하는 총각과 이를 거절하기 위해 서울나들이와 축성을 내기로 건 과부와의 전설이야기가 전해온다.

​​ ▲ 남산마을과 귀래정

​남산마을은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 申末舟의 처가이자 11대손 신경준의 탄생지이다. 마을 위쪽에 자리한 귀래정 歸來亭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이다. 귀래정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자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신말주가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서거정이 도연명의 '귀거래사 歸去來辭'를 언급하며 명명한 정자다.

신경준은 지리학과 언어학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다. 조선 영조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 전통 지리서인 '산경표 山經表' [1769]를 편찬했으며 '훈민정음운해 訓民正音韻解'를 저술했다.

한글은 발음기관을 상형화하여 오행의 원리로 자음을 배치하였음이 애초의 해례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불과 80여 년 전에 발견되기 전까지 언해본에 기록된 발음오행에 의한 오류는 성명학 등 분야에서 현재까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언해본이란 해례본을 한글로 풀어 쓴 것인데 영조시기 신경준이 원래의 수오행인 ㅇ, ㅎ을 토오행으로 분류했고 토오행인 ㅁ, ㅂ, ㅍ을 수오행으로 분류했다. 중종시기 역관 최세진이 북송의 소옹 강절이 쓴 책을 참고하여 사성통해를 지었는데 이를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의 한자 발음이 한글과는 맞지 않으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서거정이 도연명의 '귀거래사 歸去來辭'를 언급하며 명명한 정자다"

​ ▲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2000년 1월 13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로 180㎝, 세로 54㎝로 재질은 소나무로, 소나무 판 2장을 위아래로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성황대신 사적 현판이라고도 한다.

1563년(명종 18년)에 처음 각인하였고, 1633년(인조 11년)에 개각하였다. 현재의 현판은 1743년(영조 19년)에 성황당을 고치면서 각인한 것으로, 총 73행, 1,600여 자인데 행마다 자수가 일정치 않다. 내용은 고려 충렬왕 忠烈王 때 성황대신이라는 작호를 받은 충신 설공검(薛公儉:1224~1302)과 대모산성의 양씨 부인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단오에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는 것과 1823년(순조 23년) 성황당을 개건할 때까지의 사실을 이두와 한자로 각인하여 성황제의 변화를 알려준다.

​설공검은 자가 상검 常儉, 호가 경재 敬齋이며, 본관은 순창으로, 추밀원 부사 副使인 아버지 신 愼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황당은 1940년경까지 옥천동에 있었는데 이후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현재는 흔적도 없다.

현판은 1992년 옥천향토사회문화연구소가 순창설씨의 집성촌이던 금과면 동전리의 민속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영조 19년(1743)에 만든 것으로 후에 영조 30년(1754)과 순조 23년(1823)에 추가로 새겨 제작된 것이다. 현재 각 지방에서 마을 공동으로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성황신앙의 역사상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민속자료로 커다란 가치가 있다.

​ ▲ 전봉준장군 피체지

​2005년 5월 복원한 전봉준장군 피체지는 19세기말 조선의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역사적 현장이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인 개혁정신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건립되었다. 전봉준장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충남 계롱산에 머물 때, 스님 한 분이 "재기에 성공하려면 계룡산과 경천을 피해라"라고 하였다. 그 후 장군이 추격을 피해 피노리에 숨어들었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부하가 전봉준을 밀고하여 붙잡히고 말았다고 한다. 피노리 뒤에 있던 산 이름이 계룡산이었고, 부하의 이름이 경천이었으나 전봉준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봉준장군 피체지 전시관에서 역사유적을 살펴볼 수 있고, 피체지 주변에 대법원 가인 연수관, 훈몽재, 낙덕정 등 문화유산이 가득해 문화유산 답사 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녹두관(농촌생활체험관) 은 규모가 다른 5개의 객실과 다목적실, 샤워실, 휴게실, 체육시설 등 최대 100여명까지 숙박할 수 있는 콘도형 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족단위 방문객과 청소년들의 방문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복분자 체험, 다슬기체험 등 시골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농촌생활체험이 가능해 도시민들의 자연체험의 장이 되고 있으며 인근 강천산 군립공원과 산림박물관, 장류박물관 등 관광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 백승기

무학대사가 회문산 만일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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