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03. 남원시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여기가 역사 현장이고, 우리가 바로 역사 인물이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역사의 언덕마다 씨앗 문화로 꽃 피윘다. 마음씨 말씨 글씨 솜씨 맵씨 묻어 전통문화로 역사를 지켜왔고
마을 집집마다 조상들의 혼불인 불씨를 제 목숨 걸고 계승했다. 환란시에는 외세가 비집고 들어와 불덩이를 끄려 했었고
불씨 끄러 온 자들에게 스스로 말려든 얼간이들도 있었다. 세계가 자국의 문화가치를 인류사적 가치로 인정받으려고
역사의 자취를 고증하며 유네스코 등재를 앞다투고 있다. 우리도 많은 유산이 등재되어 역사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선열들이 목숨 바쳐 지켜온 배달겨레의 유구한 역사 현장 민족사관도 없는 저들에게 역사를 더 이상 맡길 수는 없다.
언제까지 역사 왜곡에 두 눈 감고 더듬거려야 할 것인가? 단군의 역사를 역사로 가야 문화를 한민족의 얼로 인식하자.
강토를 지켜온 조상님들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마음 내고 발길 내어 우리 조국 바르게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한 발씩만 더 앞으로 걸어보자.
▲ 가야부터 현대까지
'남원의 문학', '남원의 소리', '남원의 역사'의 속살을 열어가며 설레임과 힐링을 만끽할 수 있다.
현대소설의 걸작 혼불과 최명희에 얽힌 사연을 풀어보았던 혼불문학관과 노봉마을, 가야의 역사를 돌아본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 소리의 고장다운 국악의 성지, 동편제 마을, 이성계의 흔적 황산대첩지비, 정유재란때 산화한 선조의 혼을 위로 기념하는 만인의 총 등 가야부터 현대까지 망라되었다.
▲ 최명희와 혼불문학관
17년이라는 집필기간, 원고지 1만2천매, 5부 10권의 대하소설 최명희(1947~1998) 혼불의 배경이 된 서도역과 노봉마을에서의 여정을 시작하자 최명희의 벗과 지인들의 방문을 반기듯 비가 그쳤다.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 소리까지 일었다…'로 시작하는 혼불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를 배경으로 수백 년 대를 이어오고 있는 남원 매안이씨 집안의 무너져 가는 종가를 둘러싼 가족사를 다룬 작품이다. 청상의 몸으로 다 기울어져가는 종갓집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는 청암 부인, 허약하고 무책임한 종손 강모를 낳은 며느리 율촌댁, 강모의 색시이자 손부인 효원이 종부3대의 모습과 신분해방을 꿈꾸는 하층민들 간의 갈등과 애환을 다루고 있다.
최명희의 소울메이트 이금림 작가는 "혼불은 어느 작품보다 문체의 아름다움이 베어 나오고 있다.
구수한 전라도 그것도 남원 사투리로 판소리 운율까지 지키고 있어 역작 중의 역작이다.
경상도 문학의 대표가 박경리라면 호남엔 최명희가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라도 그것도 남원에서 태어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금림 작가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저미듯 공감된다.
소설 혼불 10권을 완간했을 당시 KBS 보도위원 이었던 류균 회장이 혼불을 9시 뉴스에서 소개했던 일화, 최명희 작가 임종 이야기, 최명희 작가 생가터 인근의 전주한옥마을에 최명희 문학관을 조성한 과정 등을 이야기할 땐 혼불이 곁에 와 있는 듯 했다
▲ 유곡리 두락리 가야고분군
"당시 아영분지 일원에 자리했던 가야세력의 위세를 실감케 한다."
가야사의 중심이 경남에서 전북으로 옮기어지는데 유곡리 두락리 가야고분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2박3일 전북을 걷다"를 진행하면서 역사적 의미가 가장 잘 부각되면서 공감을 얻은 곳이다.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은 구릉의 능선 정상부와 사면부에서 직경이 20m 내외되는 40여의 고총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예전에는 고분이 약100여기 이상 존재했다고 해 당시 아영분지 일원에 자리했던 가야세력의 위세를 실감케 한다. 고분은 1973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으며, 당시만 해도 전라북도 지역의 가야의 실체에 대한 인식 부재로 인하여 백제시대 고분으로 판단했다. 이후 1989년 발굴조사를 통해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가야시대 고분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2013년 32호분 발굴조사에서는 세장방형 형태의 주곽과 부곽이 '='자형으로 배치되어 확인되었다.
석곽은 일부 도굴이 이루어진 상태였으나, 피장자의 성격과 지위를 가늠케 할 수 있는 청동거울, 금동신발 등이 출토되었다.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전북지역의 가야문화유산의 실체를 보여주었으며, 역사적 ·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는 동시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은 현재 유네스코 최종 심사만 남겨둔 상태이다.
▲ 황산대첩비지
이성계가 조선 개국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시점인 황산대첩을 기념하는 비석이 유난히 빛나고 있다.
이성계의 힘의 원천은 여진족이 주력인 가별초였다. 여말선초 사병은 무너진 정규군의 무력을 대체하는 중요한 전력이었다.
가별초는 후에 중원과 몽골까지 제패한 여진족(만주족)과 세계를 정복한 몽골족으로 이뤄진 혼성기마병으로 세계최강의 정예병이었다.
전주에서 출발해 삼척을 거처 함흥에 정착한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몽골족 원나라의 천호장 겸 다루가치 벼슬을 했다. 이행리 이자춘 대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의 지방 호족으로 성장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췄다.
아버지 이자춘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데 큰 역할을 하자 동북면 병마사를 공민왕으로부터 제수받았다.
아버지 이자춘의 뒤를 이어받은 이성계는 여진족의 천호장 이지란(퉁투란, 이두란)과 의형제를 맺으며 막강한 여진족의 무력을 흡수하여 동북면의 강자로 성장했다. 2천~3천명의 정예 기병을 중심으로 홍건적을 물리치고 원의 잔당 나하추를 격퇴하고 고려 북방을 평정하여 많은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고려의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황산대첩 이후이다.
진포로 상륙한 왜구의 500여척의 배를 최무선이 화포로 모두 전소 시키자 퇴로가 끊긴 왜구는 25,000여명의 대군으로 육로를 따라 삼남 일대를 노략질하며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순찰사로 임명하여 토벌케 했다.
기병인 2천여 명의 가별초를 이끌고 남원 교룡산성에 주둔하여 지리산과 운봉일대를 정찰한 후 곧 바로 쉬지 않고 운봉에 집결한 10배의 왜구를 기습하여 황산에서 전멸시켰다.
그동안 폐퇴를 계속했던 고려군의 사기를 단번에 역전시키며 대승하며 삼남에서 왜구를 섬멸하는 쾌거였다. 황산대첩으로 이성계의 이름이 삼남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황산대첩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1575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비석 건립을 조정에 청해 왕명으로 황산대첩비가 건립되었다.
황산대첩 이후 이성계는 동북면과 삼남 등 고려 전국의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유력 정치가로 성장해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다.
박창보
2박 3일 남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많은 것을 깨닫고 공부할 수 있었다.
작은도서관 개설과 지역탐방은 힘들고 외로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껏 웃을 수 있었고 힐링이 되어 좋았다.
최명희 선생님의 절친이신 이금림 선생님으로부터 혼불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고 작품의 배경이 된 종가를 비롯해 문학관 등을 둘러볼 수 있었다. 서도역 혼불마을 정현도서관에 제 책이 2종이나 함께 기증되어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함을 느꼈다.
가야유적지를 방문하여 둘러보고 남원이 임나일본부의 기문국이 아니며 유네스코에 등재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뜻있는 학자들과 시민들의 힘 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사노식비가 지배한 역사 치매국이다. 사노식비란 사대주의의 노예, 식민사관의 노비라는 뜻으로 내가 만든 신조어이다. 1만년에 육박하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커녕 잊고 애써 외면하는 동안 강역과 정체성은 껍데기만 남아있다.
예컨대 가야사를 복원 한답시고 1조 2천억이나 투입되는 예산은 사노식비들의 꿀잔치가 되었으며 이런 식으로 시들어가는 대한민국은 동북공정과 임나일본부의 먹이가 될 것이다. 동북아의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