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전북을 걷다] 02. 부안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갯벌에서 생명의 밭 일궈 수천년간 켜켜이 쌓인 조상의 발자취-패총
삼면이 바다인 우리 강토는 담수와 해수가 동거했다. 하늘의 조화로 민물과 짠물이 어우러진 생명의 밭에서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달 빛 그림자 갯벌을 보았는가? 조상님들 신단수 마을마다 단골네 생명문화 일으켰다.
수렵 어로 채집에 의지하며 한 생명 유지해온 선사시대 영장류인 인간이 갯벌에서 흑련 한 송이 피우게 하려고
하늘과 땅이 손잡고 잠시 사랑으로 내준 생명의 밭이다. 대항리 패총은 역사 속으로 걸어가는 비밀의 통로다.
쓰레기 더미 돌무더기 방파제에 버려진 대항리 패총 조상님들 식재료로 채집한 조개 먹고 버려둔 패총무덤
껍질이 무덤처럼 쌓여있어 조개무덤 조개더미라 한다. 조개무지 안에는 님들의 숭고한 숨결이 함께 살아 있다.
선사시대 조상님 손길 발길 몸길내어 일궈낸 갯벌에서 한 땀 한 땀 일으킨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을 아는가?
반만년 역사의 고개마다 가슴으로 부르던 빈 조개 소리 단군의 후손이여! 자명등을 밝혀라 깨어나 볼 수 있도록
▲ 대항리 패총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정착생활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자연환경이 좋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움막을 짓고 가족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주변에 물이 흐르고 경작과 사냥 물고기 잡이가 쉬운 곳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인류가 출현하고 끝없이 이동한 루트를 보면 해안이나 강줄기를 따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부안 변산의 바닷가 역시 풍광이 수려하고 손쉽게 채취할 수 있는 조개류가 지천에 널려 있었으며 어종이 풍부했을 것이다. 뗀석기와 빗살무늬 토기 등의 유물과 패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접어들기까지 부족을 이루어 집단거주를 하였을 것이다. 밭농사와 더불어 원시적 수공업, 토속신앙 등을 관장하는 부족장은 주로 연장자가 이끌었을 것이다.
패총이 발굴된 지점은 조개껍질 등을 버리는 쓰레기장이었다.
1967년도에 처음 발견될 당시에 이 패총의 범위는 남북 약 14m 동서 약 10m 내외로 지표에서 127㎝ 깊이의 암반층에 이르기까지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지표하 50㎝부터 깊이 50-60㎝의 패각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다.
유적 발견 당시 타제석기 5점과 즐문토기계 토기편 2점이 채집되었다. 1981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이후에도 경작지로 이용되어오다 2012년 시굴조사를 통하여 그 규모를 확정한 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유적을 정비했다. 2012년 시굴조사는 대항리 패총의 범위를 확정하기 위해 진행된 시굴조사로 조사결과 범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는 새만금 방조제 공사의 여파로 지형의 변화와 무관심으로 서서히 훼손되어 가고 있다. 둑을 쌓아 침식을 막고는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패총이 보일 수 있도록 유리로 마감한 후 관람 통로를 만들고, 해변 쪽으로 디자인된 외벽 방파제를 구축하면 아름다운 경관과 더불어 세계적인 역사관광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우반동 마을과 반계수록 유형원
바닷가에 인접하여 있으면서 숲과 골짜기를 따라 널따란 평야가 자리한 곳 우반동마을(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정감록에서 십승지라 칭한 곳이다. 이 우반동이 실학파의 시조 반계 유형원(1622~1673)이 32세 되던 해에 들어와 학문연구에 몰두하며 그가 꿈꾸던 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곳이다. 반계수록 집필처인 반계서당에 올라 역사를 거닐어 본다.
반계서당 가는 길은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워지는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 전남 강진 다산초당 오르는 길과 유사함으로 오버랩 된다.
반계는 20여년을 성리학을 비롯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병법, 세금 등에 관해 섭렵하며 전통 사회 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사상체계인 국가개혁안이 총 망라된 반계수록 磻溪隨錄을 집필했다.
26권 13책으로 구성된 이 책은 토지소유에 대한 전제 田制, 인재교육과 선발에 관한 교선 敎選, 관료제 운영에 관한 임관 任官, 통치기구에 관한 직관 職官, 관리 급여에 관한 녹제 祿制, 국가방위에 관한 병제 兵制 등을 담았다.
이매창(1573~1610)이 유희경(1545~1636) · 허균(1569~1618)과 시와 문학을 통해 인생을 논하며 교분을 나눈 곳이 선계폭포다. 또한 선계폭포는 이성계가 머물며 공부와 무예를 닦았던 곳으로 성계폭포로도 불리우며 성계골이라고도 한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 이매창 마음속의 진정한 정인은 누구였을까? 선계폭포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건천으로 물은 흐르지 않고 말라버린 선계폭포는 답이 없다. 역사의 또 다른 의문은 허균이 홍길동전을 저술한 곳으로 추정되는 정사암터는 어디였을까? 역시 답이 없다.
또 내소사, 실상사, 청림사, 선계사가 변산 4개 사찰이었으나 내소사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사찰터 조차 밝혀지지 않은 선계사 터는 어디일까? 해설사가 안내해준 길을 따라 선계폭포 위에서 사찰터와 정사암터를 추정해 봤다.
먹는 물이 있고 하늘의 기운이 내려오다가 멈출 만 한 곳에서 1560년대 당시로 돌아가 본다. 허균의 마음으로 다가서며 정사암터를 찾을 수 있었다. 정사암터로 추정되는 암반에 둘러앉아 날이 저물어 월명암을 찾아가지 못하는 심정을 담았다.
매창을 그리는 허균을 달래주는 심정으로 부설거사의 '팔죽시' (浮雪居士 八竹詩)를 읊었다.
▲ 월명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 말사로 691년(신문왕 11년) 고승 부설 浮雪이 창건했다 한다.
조선 선조때 고승 진묵 震默이 중창하여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고, 1863년(철종 14년) 성암 性庵이 중건하였다. 1908년에 불탄것을 1915년에 백학명 白鶴鳴이 중건하였고, 1956년에는 원경 圓鏡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중요문화재로 1992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부설전이 있다. 부설전은 월명암을 창건했다는 부설거사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부설이 태어나면서 부터의 행적과 월명암에서 함께 수도생활을 한 영조 靈祖, 영희 靈熙 두 스님과의 법담과 부설거사의 오도송 悟道頌이 기록되어 있고 사부송 四浮頌과 팔죽시 八竹詩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저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월명암에서 바라본 낙조와 아침 해돋이의 운무는 황홀의 극치이다.
백승기
생거부안에서도 역사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쁘다. 패총의 역사 대항리. 백제 부흥을 위한 백강전투 그리고 이성계와 선계폭포, 이매창을 중심으로 하는 유희경과 허균의 로맨스가 존재함으로써 실존 철학자 반계 유형원은 우반동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의문에 의문을 보태며 역사탐방은 점점 흥미로워 지고 있다.
윤재민
대항리 패총의 모습을 보며 한민족의 역사는 현재도 묻히고 있는 진행형인가? 대항리 패총은 언제까지 출입금지 팻말에 갇히고 주변의 쓰레기 더미와 같이 묻히고 말것인가? 우리민족 고대 역사의 진실은 과연 언제 파헤쳐 질 것인가? 하루 빨리 연구와 복원을 통해 한민족 고대사의 진실을 전세계가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김주원
선계폭포는 이성계와의 인연이 있는 곳이라서 성계폭포로 불리기도 한다. 선계폭포는 보통날에는 물이 떨어지지 않고 비가 오면 바위틈으로 물이 모여 폭포를 이룬다고 한다. 작은 폭포에도 조선건국 거장 이성계, 조선의 3대 여류 시인에 해당하는 이매창의 이야기가 담겨있음이 신기하기도 해서 지역 탐방의 묘미가 더욱 강해지는 느낌이다.
박창보
신석기시대부터 조상들께서 풍부한 먹을거리가 있는 이곳에서 고기를 잡고 조개도 캐서 생을 영위하며 후손을 남겼을 것이다. 현대화의 부작용으로 생태계의 변화가 오니 주민들의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을뿐 아니라 유적지가 침식되고 있었다. 축대를 쌓아 보호를 하고는 있었지만 패총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참석자들의 의견대로 유리로 마감하여 당시의 조개가 쌓인 모습을 볼수 있게 한다면 변산해수욕장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명인이 운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