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17)서울 천도교

김현종 · 2026-05-26 · 자유

날개야 돋아라! 우리 한번 날아보자

천지인(天地人) 조화로 탄생한 기초산업은 의식주를 평등하게 했고 도깨비들 고차산업으로 승화시켜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데 공헌했다 복지나라는 표면적 계획 아닌 본질 깨닫는 통찰에서 시작해야 하며 진또배기 터줏대감 다(N)차 산업으로 생명 중심 복지국가 열어보자

현대는 물질 만능의 소비시대로 시장경제 외래문화 앞장서 주도하니 척박한 땅에서 구원이 약속된 가나안 땅을 찾아 나선 여정과도 같다 한국 월급은 자국 연봉만큼 경제적 차등이 높아 선망의 땅 되었으며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개인주의 앞세운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되었다

우리의 전통 한복 한식 한옥은 시대의 흐름 속에 양복 양식 양옥과 동행하며 세계 문화와 균형 평등을 이루고 k-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초 경쟁력 시대 자본사회 빈익빈 부익부는 삶의 차등을 심화시켰고 평등평화를 위한 절대행복 가치의 꿈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상대적 비교에서 벗어나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가치를 깨달아 각자의 자각에서 비롯된 능력으로 절대 행복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천국 아래 한국을 꿈꾸며 속속 모여드는 시대에 생명 존중으로 평화로운 지구와 자각적 만족의 미래 열어가야 한다

천지인 삼합에 의한 복지나라 열쇠는 생명 존중의 인내천 사상으로 사람 중심 문화를 전통의 뿌리 위에 올려 새로운 N차산업 구축하자 뉴디지털 유목민 시대 한국은 이미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k-문화의 보고로 새로운 희망 싹틔우며 날개야 돋아라! 우리 한번 날아보자!

▲동학 장군 전봉준, 현대 한국 정신 지도자로 살아있다. 성공하지 못한 동학 농민 봉기! 동학 여행 내내 우울함이 함께 했다. 130여 년 전에 일어난 동학 농민 봉기는 후반으로 가면서 혁명성을 띠게 되는데 모든 봉기가 이처럼 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당연하게 보인다. 동학혁명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 전봉준 장군을 되돌아본다.

조선 후기 문벌 정치의 독무대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정치도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지경으로 문란하고 기강이 해이해지자 민중의 수탈은 극에 치달아 대동법이나 환곡 같은 좋은 제도가 할당제로 바뀌자 가난한 사람들이 죽거나 집을 떠나 떠돌이가 된다.

이 시기 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에 맞서 싸우는 민중 지도자가 나타나는 데 그가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단순히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개혁을 꿈꾸며 행동하는 사회 개혁가로 큰 변화를 일으켰으며, 그의 개혁 정신은 중요한 유산으로 남는다. 전봉준의 사상은 인내천(人乃天)과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대표되며,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원칙을 강조하는데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전승한다.

한편, 전봉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처절하게 진압되어 군사적 전략과 조직력에 대한 비판이 남는다.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폭력적 방법은 당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동학농민군 내부에서의 갈등과 분열도 전봉준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지도력과 조직 관리 능력에 대한 문제점도 엿볼 수 있다.

전봉준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며 집권 세력의 냉정한 평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한 사회 개혁 정신은 근세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3.1독립운동의 산실 천도교 봉황각 ▲우이동 봉황각에서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동학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義庵 孫秉熙)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꿨다. 동학혁명 당시 북접을 이끄는 통령(統領)이 되어 남접의 전봉준 장군과 연합하여 충청감영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군하려 했다. 우금치전투에 패하고 후퇴를 계속하다 몇 차례 승리했지만 결국 보은 북실전투에서 패하고 북접을 해산하였다. 이후 의암은 해월 최시형을 모시고 원주, 여주 등으로 은둔하게 되었다. 37세인 1897년 의암은 해월로부터 교단의 종통을 이어받았다.

1911년 의암은 북한산의 동쪽 계곡 도선사 아래 산림으로 울창한 우이동 일대 수만 평의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1912년 봉황각을 비롯하여 여러 채의 건물을 짓고 500여명의 교역자에게 3년간 7차에 걸쳐 49일 연성기도와 역사교육,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훗날 이들에 의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봉황각(鳳凰閣)은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삼일운동의 발원지며 독립운동의 성지다.

의암은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5월 19일 서거하였다. 향년 62세, 일제에 의한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순도(殉道)였다. 봉황각 옆 능선에 묘소가 있다.

▲동학의정신 3.1운동으로 다시 피어나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의 사상과 정신은 수만의 동학농민군들 죽음과 함께 핏빚 땅속으로 묻히고 말았을까?. 아니면 인내천과 척왜양창 뜨거운 외침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을까?

1919년 3월1일 삼일독립선언서의 정신은 첫째, 한민족의 독립정신 및 그 유래를 철두철미 민족 고유의 양심과 기능에서 발동하도록 하고, 둘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결코 배타심 특히 단순한 배일정신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발전상 당연한 지위를 요구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셋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한국인 독자의 이기적인 동기에서가 아니고 동양 전체의 평화 및 세계 역사의 추세에 비추어 불가분한 것으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며, 넷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고, 그 목적을 완수하기까지 어디까지나 지속할 성질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것 등이었다.

이날 모인 민족대표 중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으로 모두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키로 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천도교측 15명 가운데 9명이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지도자(大接主)들이었다는 점이다. 또 동학혁명 당시 황해도 지역 접주로 참전한 김구선생은 3·1운동 이후 조직된 상해임시정부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동학은 동학농민혁명에서 3.1 독립운동으로 또 저 멀리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으로 그리고 광복 이후에는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아 있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계승한 독립 정신의 결정(結晶),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는 관련이 없는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양을 몰아내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킨 동학농민군의 정신과,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선 거룩한 열정이 다를 바가 있는가.

실제로 1894년 황해도 접주였던 김구 선생은, 1911년 황해도 일대의 항일세력이 대거 체포된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제3대 교주가 된 손병희 선생도, 1919년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그 외에도 강우규, 유관순을 비롯하여 안창호, 신채호, 이회영, 백정기 등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의로운 정신이 새겨져 있다.

1907년 8월에 경성감옥으로 출발한 서대문형무소는, 1912년 마포형무소에 경성감옥의 이름을 넘겨주면서 서대문형무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1945년 광복 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7년 폐쇄되었고, 이듬해 1988년 2월 27일 대한민국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감옥을 기념해야 하는 우리의 슬픈 역사 위에서 피어난, 민족정기의 영롱한 결정(結晶)이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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