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16)충북 보은·경북 상주·예천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천지인(天地人) 다차산업 시대를 열자

지구는 인간 생활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내어 주었으며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갯벌에서 조개 밭을 일구며 살았다 솔트를 통한 물물교환 문화는 협력을 기반으로 확장되었고 인간의 욕구에 맞춰 초목과 땅을 내주며 평등을 가르쳤다

하늘은 자연을 경영하며 헛됨 삿됨도 없이 조화를 이루고 공기와 물로서 생명 유지의 필수 자원을 충족하게 하였다 생명체 간의 조화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번영하게 하였으며 인간은 이를 통해서 진리를 아는 지성과 깨달음을 얻었다

땅은 인간에게 의식주를 지원하며 평등을 실천하는 역할로 편향되지 않은 평등의 원칙으로 홍익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인간은 땅에서 얻은 교화력으로 삶의 무대를 확장하였으며 땅의 평등성은 희로애락을 일깨워 행복을 추구하게 하였다

인간은 생필품 생산과 유통으로 협력의 산업틀을 만들기에 생명력 민족공동체는 산업협력체 발전으로 역사 견인한다 조화와 평등에 기반을 둔 인간정보학은 새 문을 열었으며 정치와 행정은 다차산업 유지·발전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지구와 인간은 한울 아래 하나로 연결된 우주 공동체로서 서로 의지하며 새 생명을 담아내는 동학 한울님 동반자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며 조화 이루며 살아가는 지구촌은 천지인 삼합 정신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지켜내야 한다

▲보은 동학농민운동 동학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은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은둔하며 교세의 확장을 꾀했다. 조용히 교세를 넓혀가던 해월은 1871년, ‘이필제의 난’으로 다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1880년, 강원도 인제에 은거하면서 동경대전을 간행했고 다음 해에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개접제와 육임제를 시행하면서 조직을 정비하였다. 경전이 만들어지고 신도들이 늘어나자 깊은 산골에 은거하던 해월은 평지를 찾았다. 강원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충청도의 보은은 좋은 입지였다. 속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은 은거할 공간이 많았고 삼남을 치리할 수 있는 지리적 요지였다. 유사시 산속으로 피신하기 좋은 계곡의 초입 장내리에 터를 잡았다.

1892년 10월, 공주감영에 모인 동학도들이 충청감사에게 소장을 제출하며 제2차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다.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수만명의 교도들이 모여 전라 감사에게 교조신원과 동학의 공인, 부당한 주구(誅求)의 중지를 요구했다. 1893년 2월, 40여명의 교도들이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 복합상소를 올렸다. 결국 모두 무위로 끝나자 해월은 드디어 결단하였다. 3월에 장내리로 전국의 동학도들을 집결시켰다. 몰려든 3만여명의 동학도들은 교조신원과 함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기치로 대규모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시절 장내리는 장안으로 불리며 동학의 중심지요 조선 민초들의 희망의 땅이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집회 보은취회에 고무된 동학도와 농민들은 1984년 1월 고부봉기로, 3월 무장기포로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해월도 기포령을 내려 북접을 꾸리고 손병희를 통령으로 임명하여 남접 전봉준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우금치를 끝내 넘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 보은으로 돌아왔다. 장안은 초토화 되었고 전투에 지친 혁명군들은 인근 북실마을 이곳 저곳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결국 북실전투에서 수천명의 농민군들이 최후의 항전을 펼치며 산화할 때까지 보은은 동학농민전쟁의 또다른 중심이었다.

▲상주 동학교당과 경천교 동학농민혁명이 패배한 후 여러 가지 이유로 거듭 분열된다. 주요 원인으로 군사적 실패와 이념적 차이가 있다. 군사적으로는 혁명군이 한양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고, 이후 동학의 이념에 분열되는데 교주의 사상과 혁명적 사상 간의 갈등이 심화된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과 전봉준의 갈등은 동학의 내부 분열을 초래한 중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최시형은 전통적인 교리와 교단 운영을 지향했으나, 전봉준은 현실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하며 더 혁신적인 현실 문제에 접근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동학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최시형과 전봉준의 죽음 이후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경북 예천 동학공원 서정자들 전투 최시형의 둘째 사위 손병희가 동학 3대 교주가 되어 천도교를 창시하여 순수 교단을 표방하자 이를 이념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 삼풍 김주희는 1904년 조선 십승지 하나인 경북 상주군에 경천교를 조직하고 정수기를 교주로 내 세운다. 그러나 정수기가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하려 하자 1907년에 결별을 하고 1915년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동학교를 만들어 1918년 상주에 동학교당을 창건하게 된다.

한편, 경천교 교주인 정수기는 보은 의병에 참여했으나 체포되어 1912년 청주 형무소에서 참형되고 이어 경천교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해체된다. 짧은 시기에 생성되고 사라진 경천교의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동학 농민 봉기는 혁명으로 이어졌고 일본과 조선 관군의 제압으로 실패했으나,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의 간접 통치를 반대하며 자주 국가의 권리를 요구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국가의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게 된다.

▲예천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의 안타까운 결말 1894년 7월 관동대접주 최맹순의 휘하 48개 접소에는 7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모여들었다. 관리와 구실아치[아전]들의 학정과 반상의 차별에 시달린 민초들이 주를 이루었다. 무과 급제(1888) 후 사헌부 감찰(1892)을 지낸 윤치문(1866~1894)처럼,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국왕을 위협한 데 격분하여 일본군과 싸울 일환으로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천의 유림들은 동학농민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였다. 예천 객사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보군을 모집하여 관군·일본군과 합세, 동학농민군 응징에 나섰다. 민보군과 동학군의 갈등이 첨예하게 된 사건은, 지주들의 재산을 빼앗은 동학농민군 11명을 민보군이 한천 모래사장에 생매장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천 동학군 전기항 묘 동학농민군에게는 제폭구민과 척왜양이 의병 모집의 목적이었으므로, 예천읍내의 유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고, 민보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공략할 방법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보군은 동학농민군의 이러한 소통 노력을 틈타, 세력을 강화하고 소총수 100여 명과 함께, 한천 제방, 서정 제방 양쪽에서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수적 우위에도 절대적인 화력 차이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던 가운데, 안동 구원병 3,000명이 온다는 소문은 동학농민군의 전투 의지를 꺾어 버리기에 충분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7,0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고 만다. 다음날 안동 민보군 3,500여 명이 들어와, 잔여 동학군의 저항 의지마저 꺾어 버렸다.

동학농민군의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 천석꾼 전기항[풍채가 좋고 살림이 넉넉하여 별명이 도야지였다고 함] 역시 그 좋던 살림을 모두 빼앗기고 소백산을 전전하며 화전민 생활로 연명하다가 1900년 73세의 나이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있을까만 예천의 민보군이 동학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에 총을 겨눌 수 있었더라면 어떤 역사가 전개되었을까?

▲최후의 항전 북실 전투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은 1892년 12월 6일 보은 장내리에 교조신원운동에 필요한 지휘본부인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1893년 4월 26일부터 5월 17일까지 벌였던 보은취회를 시작으로 1894년 12월 18일 북접의 마지막 항전 북실전투까지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불꽃으로 타오른다. 북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중 하나이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패배 후 태인, 장흥, 무주 등의 전투를 거치며 1894년 12월 16일 청산을 지나 보은을 점령한다. 다음 날 저녁 종곡리 북실마을에 진을 친다.

당시 일본군 보고서는 “종곡 남쪽 고지를 점령하였더니 동학도 약 1만 명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각기 몸을 녹이고 있었으며 조금도 방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산개하여 약 세 번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의 정신을 교란하게 한 다음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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