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14)경복궁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치화력으로 평화의지를 살려라
인간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간들은 정복하기에 항상 바빴고 인간을 정복 대상으로 침략하고 방어했던 역사 현장들이다 정복자든 방어자든 승자를 영웅삼아 역사앞에 세워야 했고 국가는 소비재 양산하며 인간을 소비 대상으로 몰아붙였다
우리 인간은 하늘땅을 맺어주고 가는 우주만물의 영장으로 공생공존 의지로 평화로운 지성 감성 저마다 발휘 하였다 삶의 보람과 가치창출 위해 끊임없는 의지력을 발산했으며 평화 위해서 평등의지력 다지며 지혜로운 협력을 이끌었다
지구는 인간 이기력의 횡포로부터 출구작전을 시도 했으나 현상계 유니버스로부터 가상세계 메타버스만 만들어 냈다 현실도피로 상상력 열어 사이버 공간 IT, AI를 출현시키고 성실과 노력대가를 넘은 가상경제 비트코인 넘나들며 산다
한 교사가 한 교안으로 한 학급을 가르쳐도 순위가 다른 건 교사 책임보다는 학생 개인의 습안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을 소유 소비에 의한 교안과 정복대상으로 삼기 보다는 홍익인간 생명 중심의 상생과 생산문화 대상이 되어야 한다
미래과학 미래산업 발전을 위한 메타버스가 잘못 조립되면 주어 동사 목적어 없는 혼돈메타버스로 만취주행하게 된다 유니버스든 메타버스든 생활 5대요소는 의 식 주 행 문으로 天(자유지성) 地(평등감성) 人(평화의지) 삼합이 필요하다
▲야밤에 경복궁을 침탈한 도둑들(1894년 7월 일본군 경복궁 진입) 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에 총성이 울려퍼진다. 당시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위해 경군의 상당수가 한양을 비우고 진압군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 조정에 청군 축출을 지시하라며 압박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자, 주한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주도로 23일 경복궁 습격이 추진되었다. 당시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 4천명 중 1천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
7월 23일 0시30분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는 경복궁 점령 작전이 실행된다.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과 일본군 간 치열한 교전이 발생하였다. 이와 동시에 건춘문과 광화문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사이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도끼로 부수고 궐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조선군과 일본군은 경복복궁 안팎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오전 7식 경,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였고 일본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고종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결국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회선포 8정을 압수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빠른 몽진으로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시민을 버리고 한강대교를 폭파하면서 발빠르게 피난간 이승만은 결과적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만약에 고종이 일본군에게 재빨리 피신해 일본과 전쟁을 선포하고 온나라 백성이 항전했다면 어땠을까?
▲ 경복궁에 고종을 강금 협박한 일본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결정적 사건은 갑오왜란이다. 1894년 6월 21일(음력)에 일어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으로 가볍게 지나가는 역사쯤으로 인식되어 안타깝다.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적의 포로가 되면 전쟁은 패전으로 끝이 난 것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본의 간섭과 지배가 시작되었다.
조선군은 경군(京軍)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지방으로 떠났고 빈자리에 평양기영(평양감영군)이 임시로 들어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와 함께 궁궐과 한양도성을 방어했고 외곽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다.
6월 21일 새벽, 일본군 중 1,000명의 병력이 경복궁을 공격하여 조선군의 일부를 제압하고 왕의 침소에 침입하여 고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조선군은 경복궁의 안팎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며 격전을 치렀다. 이에 일본공사 오오토리(大鳥)와 함께 입궁한 일본군 2대대장 야마구치(山口) 소좌가 일본도를 빼 들고 고종을 위협하여 무장해제 칙령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만행에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은 가짜 칙령으로 협박하여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들을 압수하였다.
선전포고 없이 조선을 침략하여 주권을 침해하고 국왕을 능멸한 일본군의 만행은 동학농민혁명군의 2차 봉기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동학농민군 2차 봉기로 이어지는 ‘삼례기포’ 조선 내에서 청나라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벌인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한다. 이에 전봉준은 “일본군이 왕궁을 습격해 국왕을 놀라게 했기에 애국심으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해 일본군과 맞서 싸우려 한 것이다.”라며 동학군의 2차 봉기를 독려했다. 1894년 9월, 일본의 노골적 침탈 행위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쟁 준비를 하며 대도소 설치, 필요한 군수품 마련 등 삼례에서 동학농민군을 결성하여 한양으로 향한다.
동학농민군은 ‘척양척왜’를 외치며 일본의 통신선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매우 두려워했다. 이 통신선은 군용 전신선으로 부산에서 의주까지 연결하여 일본 대본영으로부터 모든 지휘를 받아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본 남부병참감부 ‘진중일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일본 대본영의 가와카미 소로쿠는 통신선을 습격하는 조선의 동학농민군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토 히로부미는 고부에 제19대대 파견 명령으로써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조선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한다.
동학농민군 2차 봉기로 이어지는 ‘삼례기포’는 동학의 성장과 함께 동학에 대한 정부와 기득권 세력의 탄압과 침탈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방식에서 적극적인 대응으로 변화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구국 항일 의병 전쟁이라 규정한다.
▲경복궁 명성황후 시혜사건(1895년) 일본의 후쿠오카에 소재한 구시다 신사에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칼의 주인인 도오 가츠아키가 기증하였다 한다. 일명 히젠도(肥前刀)라고 하는데 길이가 120cm인 살상용 무기이다.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는 뜻이다. 그만큼 살해 대상자를 증오하는 한편 살해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반면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사건의 피해자인 명성황후를 바라보는 우리는 충격과 분노를 금할 길 없다. 더구나 범죄의 증거물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종교시설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 신뢰와 우호에 기반해야 할 한일 간 미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간 대한민국 국회는 결의안을 통해 수 차에 걸쳐 흉기의 압수, 폐기 처분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사과는커녕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동학과 청일전에서 승리하여 차지했던 요동반도를 일본이 도로 청에 반환한 것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3국 간섭의 결과였다. 주도국인 러시아를 주목한 조선은 이른바 배일, 친러 정책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속셈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치였다. 을미사변 1년 전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에 의해 무기를 뺏기는 등 조선의 경호체계는 와해되고 주권없는 친일 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에 대한 축출을 단행하게 되자 유길준, 박영효가 각자 그 중심에 서 있는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아이러니하게 유길준의 고발로 박영효가 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면서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일본은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를 새로이 조선 공사로 부임시켜 명성황후를 해함으로써 국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