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13)최후의 항전
김현종 · 2026-05-26 · 자유
대둔산 최후의 항전! 역사의 불씨를 남겼다. ‘한울에서 나와 한울로 돌아간 동학전사들’ 한국인의 철학은 우주 삼라만상이 한울에서 나와서 한울로 돌아가는 이치이니 우리 모두 한울에서 우리(울)인 것이다 신도 부처도 삼신할머니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도 한울에서 와 한울로 돌아가니 천지인삼합으로 같은 우리다
천지인이 우리이며 하늘의 조화와 땅의 교화 사람의 치화로 한우리 안에 시작도 끝도 없이 오가는 우리는 울안에 있다 우리나라 우리고향 우리학교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 되니 우리 안으로 끌어들여 한 울안에서 하나가 되는 한민족이다
결혼을 해도 내 아내 내 남편이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기에 자식을 낳아도 내 자식이 아닌 우리 자식으로 다 내 놓는다 수운선생 한울 의미를 알았기에 노비를 며느리 수양딸 삼고 한울로 들어가 죽어도 죽지않고 두렵지도 않은 동학 내었다
여닫고 드나들 듯 목숨마저도 애초에 온 곳으로 돌아가기에 홍익의 인내천 사고는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다 마음 그릇은 그릇이 커야 하겠지만 담기면 그릇되는 것으로 짜여진 틀에 갇히면 들리고 깰 수가 없었기에 엎어 비웠다
우리문화는 다문화 다종교를 우리식으로 바꿔 수행하였으며 수입불교 수입유교 수입기독교도 한울과 빔으로 역사바꿨다 한민족의 철학은 천지신명께 빌기만 하면 다 도통 하였기에 아름아리로 조화열고 손 모아 마음 비워며 빔철학 완성했다
▲우금차 패배 후 퇴각하는 전봉준 우금치 전투에서 2만의 동학농민군은 공주에서 두 차례 패배 이후 3천여명으로 줄어들었고, 또 두 차례 싸우니 500여명 밖에 남지 않는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동학농민군이 11월 11일(음) 오후 노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면서 우금티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조·일 연합군은 퇴각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며 공주에서 논산, 전주로 이어지는 고을을 샅샅이 뒤지며 남하하고 있었다. 그 길에 동학군으로 나간 사람을 이 잡듯 골라내 가족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선군을 사주하여 백성의 생명을 매우 잔인한 방법을 앗아가고 있었는데, 탄환을 아낀다며 총을 쏘지 않고 칼로 베거나 몽둥이로 쳐 죽이며 심지어 마른 볏단을 온몸에 둘둘 감싸고 불을 질러 죽이기까지 했다.
11월 24(음)일 동학군이 원평에 당도하여 11월 25일 읍내 인근 구미란 마을 뒷산에서 진을 치고 분노한 동학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이 격전을 벌이나, 화력 차이로 수십 사망자를 내고 동학농민군이 패배한다.
원평에서 패배 후 태인으로 물러난다. 그곳에도 조일 연합군의 만행에 분노한 8,000여 명이 대포와 구식 총을 들고 모여 있다. 전봉준장군은 27일 태인 성황산에서 총과 대포로 맞서보나 동학동민군은 패배하였다. 결국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와해되고 이것이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였다.
태인싸움에서 패배한 뒤 전봉준은 수행 몇몇과 11월 29일(음)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이때 남하하는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에 11월 30(음)일 다시 내장산의 백양사로 이동했다. 백양사에 은신할 때 사람을 통해 김개남이 태인군 산내면 종성리에 은신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태인으로 가던 중 12월 1일 저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부하 김경천을 찾아 한 민가에 은신하였다 . 그러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한신현과 김경천 등의 배신으로 피로리에서 12월 2일(음) 관군에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느슨한 군기, 빈약한 무기, 전략과 전술의 부재 등의 여러 가지 패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 전쟁은 백성의 평안과 평등을 위한 봉건사회에서의 시민혁명이며 제국주의 외세에 맞선 독립투쟁이다. 그 분들의 희생과 정신이 올곧게 후대에 전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아닐까?
▲ 동학군 대둔산에서 최후의 항전 1894년 11월 9일(음력)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퇴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으로 후퇴하여 청주에서 후퇴하던 김개남 부대와 합류하여 소토산·황화대전투에 임했다. 분전했지만 패하여 주력군은 원평으로 다시 태인으로 후퇴했다. 이때 진산, 고산, 금산, 무주, 용담, 진안 출신 농민군 수천 명이 대둔산으로 들어갔다. 지형이 협소하고 군량이 부족하여 주병력은 진산으로 넘어가고 지도자급만 산에 올랐다.
대둔산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재래식 전투에서는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방어가 용이하고 만 명의 군사로도 공격하기 어려운 천혜의 요새다. 마천대 아래 석두골 최상단 근처 미륵바위봉 아래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처음에는 최공우(崔公友) 가문이 3채의 집을 짓고 병기와 양식을 갖추었고 병력이 50여 명에 이르렀다. 전주, 공주의 병사와 금산의 민보군(民堡軍)이 연합해 토벌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토벌에 나섰다. 관군은 이두황(李斗璜) 휘하의 순무영 장병 30명, 일본군은 특무조장(特務曹長) 다케우치 신타로을 비롯하여 30명으로 최신무기로 무장된 정예부대였다.
결국 동학혁명군은 대둔산의 모진 추위와 열악한 군량 속에서도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18일까지 70여 일간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 전원 순절하였다. 도금찰, 도집강, 접주 등 지도자급 25명 모두 전사하였고 김석순 접주는 한 살 여아를 안고 150m 절벽 아래로 투신하기도 하였다.
▲전봉준! 순창 피노리 체포에 유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 대패한 전봉준, 남으로 피난하여 순창 피노리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을 찾은 연유는 고부 접주로 활동할 당시 집사 업무를 맡아보던 김경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봉준은 체포되게 되는데 김경천과 한신현 등 현상금을 탐낸 무리의 밀고로 관군이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순창 관군은 1894년 12월 초, 동학농민군을 피해 먼 길을 돌고 돌아 전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1895년 1월 24일 서울 주재 일본 영사관으로 인도되어 몇 차례 심문과 재판을 거쳐 3월 30일에 최경선, 손화중, 김덕명, 성두한과 함께 처형된다.
피노리에서 한양까지 압송되는 전봉준과 행보를 함께한 이토 겐지(조선 사람였으나 일본인으로 신분을 바꿈)가 전봉준이 사형선고 받을 때까지 회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다. 비록 친일파로 활동하였으나 전봉준의 인물됨을 아까워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전봉준은 동학농민 봉기의 중심인물로 농민군을 조직하고 농민의 요구를 정리하여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며 전투를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지역, 이념에 따라 민중의 권리와 독립을 위해 투쟁한 영웅으로, 반면 그의 행동을 무모한 반란으로 평가하는 등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은 대한민국의 근대사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사건으로 인식되어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음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원평 구미리 전투에서 원평은, 남접의 중심지이며, 대접주 김덕명, 영호대접주 김인배, 금구 두령 김사협(김인상), 김봉득, 유한필 등의 태생지였다. 전봉준도 1893년 3월, 이곳 원평집회에서 동학교도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공주 우금치와 논산 황하대(봉화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거쳐 이곳 원평 구미란까지 몰렸다. 동학농민군은 구미란 구릉 위에 진을 쳤고 일본군과 관군은 평야지대에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훨씬 유리한 형국이었다. 그러나 수천의 동학농민군은, 교도병 1대과 일본군 1대에게 37명(공식기록)의 사상자를 남기고 각기 흩어졌다. 전봉준과 잔여병은 태인으로 물러나 11월 27일 마지막 전투마저 패하고 해산하였다.
원평장터의 땅울림,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를 처단하자, 신분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왜놈들을 몰아내고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자는 외침은 그렇게 일본군과 관군의 총탄에 외마디 비명이 되어 사라졌다. 전봉준은 마침내 12월 2일 순창에서 잡히고, 세상에는 헛헛한 가락만 떠돌게 된다. 녹두야, 녹두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