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6)김제 원평
김현종 · 2026-05-26 · 자유
사람 중심 문화로 평등복지 시대를 열어보자! 형상으로 나타남을 신(神)이요 사라짐을 귀(鬼)라 하므로 우리 神話는 하늘 열어(開天) 나라를 세운 시작을 알렸다. 개국 개천 홍익이념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에 있었으니 하늘 땅 인간이 함께 어울려 함께 사는 지혜를 일깨워서 사람 중심 문화로 소도 문화를 경영하라 이르신 것이었다. 일 년 사계절이 분명하니 철을 아는 해처럼 해라 가르쳤고 계절따라 순응하는 전통문화 한옥으로 주거문화 열게 했다. 철 따라 갈아입는 고운 한복 솜씨로 멋 씨를 다듬게 했고 손맛으로 만드는 한식으로 전통의 맛 건강을 지키게 하여 우리 멋으로 80억 지구촌에 K-한류 전통문화 누리게 했다.
멋에는 한옥 한복 한식의 역사성과 가치성이 소중하듯이 민족마다 고유문화와 역사 전통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공존은 다른 특성을 존중하면서 어울려 함께 사는 길이니 평화를 의지하여 인류가 혜원상생으로 평등 문화를 열고 천지인 삼합정신과 사람 중심 문화 꽃피우는 데 동참하자. 세상은 꿈에서 무언가 들고나온 이들이 역사를 경영했다. 현안이 꼬일 때는 미래를 보는 조상님 예지가 요구되기에 평선 너머 평선을 볼 줄 아는 환상의 날갯짓이 필요하다. 세상을 넓게 보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높은 안목으로 칠산 앞바다 지키는 수성당 할미 되어 평등복지 열어보자.
▲원평 교조신원운동의 동학사적(東學史的) 의의 1892년 10월 공주, 11월 삼례, 1893년 2월 궁궐 앞 복합상소(伏閤上疏) 운동 이후, 같은 해 3월 10일(교조 최제우의 기일) 충청도 보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있었다. 같은 날, 전라도 금구의 원평장터에도 동학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양호선무사 어윤중의 해산명령으로 지도부가 몰래 도망을 쳤던 보은의 집회와 달리, 원평장터에 모인 전라도의 동학교도들은 근 한 달 동안 집회를 이어갔다. 그들은 척왜양(斥倭洋), 멸권귀(滅權貴), 나라 돌아가는 꼴을 비판하고 백성의 고혈을 빠는 탐관오리를 타도하였다. 이들은 단순히 교조의 신원을 회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동학의 사상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면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원평천변 수백, 수천의 무리가 한 목소리로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영세불망 만사지(永世不忘 萬事知)” 주문을 외고, 대창, 곡괭이, 낫자루로 바위를 내려치는 ‘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원평장터의 집회는 그렇게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혁명의 불씨를 지피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해월 최시형과 김덕명 장군의 만남 동학은 수운 최제우가 창도했지만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수운의 시천주(侍天主)를 해월은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승화시켰다. 수운의 포교는 1년 남짓, 그가 죽고 해월은 35년간 산간벽지로 은신하며 흩어진 교도들을 모으고, 교리를 정립하고, 경전을 출판하고, 조직을 확산하였다. 3대 교조 의암 손병희에 도통을 이어 겨레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덕명 장군은 40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금구포 대접주에 임명되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인배 등 동학의 주요 지도자들이 그의 그늘에서 함께했다. 교조신원운동에 1만 명을 동원하고 백산대회에 2,000여 명의 농민군을 동원한 것도 그의 출중한 리더쉽의 결과이다.
해월은 1880년 익산 미륵산 사자암에서 4개월간 은거하면서 호남 포교를 지도했다. 그리고 1889년 6월 태인 순회 때 김개남의 집에서 보름간 기거하며 포교하였다. 이때 김덕명과 김개남이 여름옷 5벌을 각각 선물했다고 한다. 1892년에는 김덕명의 집에도 직접 찾아왔다고 한다. 해월과의 만남과 가르침에 감동한 김덕명은 포교에 진력하여 많은 교도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동학혁명 내내 맹활약한 주력군이 되었다.
▲동학농민봉기를 바라보는 소소한 시각 김제 원평은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이자 최후의 결전인 원평·구미란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동학농민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고 이야기한다. 동학혁명의 거두 전봉준과 김덕명 장군의 어렸을 적 이곳에서의 인연이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주고 있다.
유서깊은 명문가 자제인 김덕명은 원평에서 1km 떨어진 용계마을에서 살았고 전봉준은 한때 원평에서 1km 떨어진 감곡 황새마을에서 살았는데, 이 둘은 봉남면 종정마을 강당에서 함께 수학하며 나이 차이가 10살임에도 의협심이 강하고 지도력이 뛰어난 것을 서로 알아보게 된다. 금구 대접주 김덕명 포가 원평 장터를 중심으로 전라도 접주가 모이는 도회소가 되면서 전봉준의 과감한 지도력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김덕명의 지혜로움과 전봉준 지도력의 화합이 참으로 뛰어나니, 동학의 개벽 평등사상에 감복한 백정 출신 동록개가 자신의 집을 동학 교주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때를 같이하여 전봉준을 회유하려고 왕의 편지와 내탕금 1만 냥을 들고 찾아온 경군(京軍)을 죽이는 원평집회가 있었다. 원평집회는 동학의 단순 포교를 넘어서 사회 운동, 정치 운동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바꾼 계기가 된다.
동학농민봉기 기념일은 관군을 상대로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둔 5월11일로 정했는데, 동학농민봉기 단초가 된 1894년 2월 10일 고부관아 습격일로 정했으면 어땠을까? 참고로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은 뚜렷한 역사적 전환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일로 했다.
▲역사 현장의 불은 누가 끄려나? 관료들의 아둔함과 매관매직으로 조선은 풍전등화가 되었다. 아전들의 폭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으로 순박한 백성의 삶은 많이 고달프기만 하다. 나라가 불이 났다. 민족의 불씨를 끄려고 온 자들과 불 끄는데 동조하는 매국노들이 쥐새끼처럼 많다. 불바다가 되었다. ‘불이야!’ 쥐 새끼보다 더 빨리 도망가는 약삭빠른 인간이 있었다. 뒤돌아보면 돌이 될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버린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언제까지 들러리로만 살 것인가? 역사 현장에 불이 나면 어느 나라로 도망쳐 살 것인가? 지구에 불나면 어느 별나라가 있어 도망쳐 가시겠는가? 지체가 아무리 높아도 공직자 안목과 이해관계는 시한부 삶이다, 금구·원평에는 김덕명 장군과 동록개 그리고 수천의 동학도가 있었다. 국민의 안목으로 역사 현장을 들여다보면 보인다. 당장 꺼야 할 불! 소방수 안목으로 보자. 진화 방법이 보일 것이다.
▲나는 조선의 백정이여 “사람들은 나를 ‘동네 개’라는 뜻의 이름인 ‘동록개’라고 부르네. 조선시대의 칠반천인인 나를 사람들은 개보다 못한 놈이라고 했고 나를 포함한 자식새끼들도 이런 멸시와 혐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힘들어했지.세상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받았으나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평생 피땀을 흘리며 모은 재산을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를 바라면서...집을 헌납하였고 그 집이 집강소(원평집강소)로 만들어졌지. 그와 동시에 나는 ‘동네 개’가 아닌 ‘동록개’로 불리우며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여. 원평에서 나, ‘동록개’는 조선의 백정이었으나 조선의 백성으로 바뀐것이지” 라며… 집강소를 바라보고 웃으며 탁주 한잔하는 ‘동록개’가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