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4)정읍 고부봉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갑질하는 조선 아전문화… 혁명의 새 물결이 필요했다 동학의 희망! 새로운 가치창출이 필요하다.

하늘로부터 더불어사는 조화력 터득하여 자유가치 얻으며 땅으로부터 활용력을 배우는 교화력으로 평등가치 배운다. 사람끼리는 스스로 치화력을 터득하고 평화가치 창출한다. 절대가치도 개인의 지성 감성 의지력 지수 따라 한계 효용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기에 개념적 가치 접근이 필요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 하늘의 조화로 태어난 인내천 우리가 태어난 곳이 지구중심 서 있는 곳이 지구 정상이다. 지평선 너머 땅을 보고 수평선 건너 바다를 본적이 있는가 어디까지가 평선 안쪽이며 어디까지가 평선 밖 이라던가? 틀 안 지성장벽 허무는 것이 자유가치의 새로운 창출이다.

사십오억 만년 지구가 온갖 공들여 태어난 지구촌 사람들 천지조화의 오늘이 어제의 끝이고 오늘이 내일의 시작이다. 탐욕의 온갖 성질 다부리고 그땐 내 성질이 아니었노라면 지금은 제정신 차려 새로운 중심을 잡았노라 말하겠는가? 탐진치 감정의 골 메우는 게 평등가치의 새로운 창출이다. 외세의 온갖 역경 이겨낸 조상 명줄로 태어난 동학혁명군 임들이 백성들 사람답게 사는 꿈을 이루어줄 희망 이었다. 턱 밑까지 쌓인 희망 주문서에 숨 한번 제대로 쉬셨을까? 내 꿈 내가 꾸고 내 꿈 이루려면 희망에 속지 말아야 했다. 서로의 의지력 조절하는 게 평화 가치의 새로운 창출이다.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눈 쌓인 배들평야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 … 전봉준은 소리 죽여 가슴으로 울고 분노는 분노로만 남아 있었고 솔바람소리는 솔바람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양성우 시인의 시 ‘만석보’ 발췌) ‘걸어서 동학속으로’ 이번 여정은 이평면 말목장터에서 시작해 고부관아터, 만석보 등 탐방으로 이어졌다.

이평면 소재 말목장터 감나무는 당시 전봉준 장군이 수천 농민에게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을 설명하고 이에 맞서 봉기할 것을 역설한 곳으로 이후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지와 같은 장소이다.

이에 탐방단은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 서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낸 동학농민군의 굳센 의지를 가슴에 새기며 동학군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격동의 조선 말기 상황과 고부군수 조병갑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의 10여년 섭정을 이어 22살이 되던 1873년 친정을 시작했다. 천운을 타고 보위에 오른 고종처럼 왕손의 부족으로 인한 혈통의 단절을 양자 입적 등의 방법으로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도 왕이 된 사례는 몇 있으나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고종 또한 정조의 군민일체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정조 21년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한 기록이 있는데 명월은 임금을, 만천은 백성을 뜻한다. 고종은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정조의 정치사상을 잇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세도정치와 섭정에 물든 정치 현실과 빈약한 국고로 인한 재정 확보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 와중에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는데 서해안을 오르내리며 강화에서 불법측량을 하며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하고 강화의 초지진과 인천의 영종진을 초토화시킨다. 일본의 자국기가 달린 함선에 포격한 사실을 트집 잡은 것인데 이때 조선은 국기와 선전포고의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강제 개항을 한 이래 내정개혁 및 개화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의 혼란스런 사건들이 일어난다. 1894년 부정과 외세에 항거한 동학농민혁명을 이유로 국내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승리한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이듬해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년 후 환궁한 고종이 광무로 연호를 정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1904년 청일전쟁 당시 삼국간섭에 굴복한 일본이 그동안의 앙심을 품고 가상 적국이었던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청, 일, 러 모두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둘러싼 전쟁이었고 조선의 주권은 없었다. 1905년 승리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의 즉위가 억지로 이루어졌으며 1910년에는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이로서 36년간의 대일항전기를 거쳐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종실록부록 10권에 수록된 고종의 행장을 보면 ‘갑오년(1894) 2월, 고부의 백성들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으로 인하여 소요를 일으키자 근처 읍 사람들이 향응하였다. 이에 초토사 홍계훈에게 병사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고 괴수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6월, 정부에 명하여 폐정을 혁파하도록 명하였으나 난민이 잠깐 잠잠해졌다가 얼마 후에 일어나니 순무영을 설치하여 신정희를 영사로 삼아 이를 토평하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고종의 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한민족 역사의 큰 변화를 불러온 도화선이었다. 선말의 농촌은 수령의 수탈과 탐학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당시에 ‘아들을 낳아 과거에 급제시켜서 전라도에 수령으로 보내는 것이 가문의 목표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매관매직으로 한밑천 잡아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는 욕망이 넘쳤을 것이다.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는 조선의 재정을 크게 의존하였을 만큼 둔전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기강의 문란에 따른 부정부패와 횡포가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을 고조시켰다. 조병갑은 고부로 부임하기 전까지 함양, 김해, 영동 등에서 선정을 베풀었다는 설도 있으나 스스로 세운 선정비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고부로 부임한 이래 만석보를 증축하며 보수를 착복하고 오히려 수세를 징수하였으며 무고한 백성에게 죄목을 씌워 2만냥을 착취하였다. 태인군수를 지낸 부친 조규순의 비각을 세운다고 1천냥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모친상 때 부조금 2천냥을 거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봉준의 부친인 전창혁에게 곤장형으로 때려죽였고 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도망쳤다 고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조병갑이 1년만에 풀려 난 것은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일족으로 가문의 위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1898년 고등부 판사가 되어 2대 동학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1904년에는 정3품 비서원승까지 올라 갔다는 점이다. 이후 나이가 들어 관직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큰 부침은 없던 듯 하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와 권력자들의 행태를 보면 초록은 동색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으며 적당히 눈 감아주고 되로 주며 말로 받는다. 입으로는 백성과 국민을 위한다지만 보이지 않는 수탈과 횡포가 만연해 있다. 힘있고 돈있는 각종 단체와 카르텔도 다양한 형태의 빨대로 나라와 국민의 고혈을 빨고 있다. 어찌해야 하는가!?

▲말목장터와 감나무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斗池里) 191-2번지의 말목(<말못(斗池))장터는, 고부농민들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봉기가 시작된 곳이다. 이곳은 고부농민봉기의 도화선을 당긴 곳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893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그렇지 않아도 만석보 물세(水貰)가 비싸서 불만이 목에 차 있는 농민들에게 만석보 하류에 필요도 없는 보(洑)를 새로 쌓게 하고 비싼 수세를 징수하였다. 게다가 맥없는 농민들을 잡아다가 불효, 음행, 잡기 등의 죄를 씌워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자기 아버지 공덕비를 세운다며 강제로 돈을 걷어가고, 대동미를 돈으로 받아 질 나쁜 쌀로 대납을 하고 그 차액을 착복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고부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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