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3)동학의 계승 동학 5대 장군

김현종 · 2026-05-26 · 자유

녹두꽃의 유훈 유업을 어찌 잊으리

천하 영웅호걸도 다 죽는데 누군들 죽지 않는 자가 있으며 한세상 살다가 돌아가는 곳 저마다 다 기한 사연들 있었다. 열매 맺어 이승끈 놓듯 한생을 접고 돌아간 동학 농민이여 나라위한 일편단심 녹두꽃의 유훈과 유업을 어찌 잊으리오.

떠나신 임들 마지막 길 밝혔던 곳에 연화 추모공간 만들어 못다 한 꿈 아픔 담아 흑련 한송이 접어 올려드려야 겠다. 감, 밤, 대추 삼실과 올려 말씀주신 숭고함으로 음복하며 매일 기도하는 성지 조성하고 파랑새 녹두꽃 들판을 보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기적이 내가 태어남으로 한꿈 꾸고 생명 빛 발휘하여 지구방주 등대를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몸도 집도 지구도 우주도 우리가 사는 집宇,집宙,집家로 생명존중 지구성지‘우주가(宇宙家)’를 소리 내 부른다.

무얼좀 한다는 자들이 물정 모르는 이들을 등쳐먹었으며 스스로 잘 나고 센 자들이 못나고 약한 자들을 지배했다. 종족 우월성을 앞세워 타 민족 침략하고 짓밟는 무력시대 왜적에 죽창들고 맞선 기백으로 인내천 동학을 계승하자.

무력전쟁 무역전쟁으로 국가경쟁력을 다투는 소비시대로 사람중심 생명존중 농생명 혁신으로 새 물결을 주도하자. 지구 지킴은 자유 평등 평화를 공유하는 인류공통숙제로 민족의 전통 문화 발전시켜 생생뜨락 잘 가꿔내야 한다.

전봉준장군의 애민정신 전봉준장군은 1892년에 동학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었고 그해 4월 고부군수로 부임(1893년 부임 기록도 있음)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고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행위를 다시 일삼자 거병을 결심한다.

거사 전날인 1894년 3월 20일 전봉준·손화중·김개남 3인의 명의로 의병으로 일어날 것을 널리 호소하는 창의문을 발표하며 혁명의 대의를 세상에 알린다. 창의문의 내용 중 “백성의 마음이 날로 나쁘게 변하여 안으로는 삶에 즐거움이 없고 밖으로는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이는 안팎으로 고단하고 참혹한 현실을 살고있는 백성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애민정신이 거병의 이유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11월 27일 태인싸움에서 패배한 뒤 전봉준장군은 수행 몇몇과 11월 29일 입암산성(笠巖山城)을 거처 내장산의 백양사(白羊寺)로 이동했다. 백양사에 은신할 때 사람을 통해 김개남(金開南)이 태인군 산내면 종성리(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은신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태인으로 가던 중 12월 1일 저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그러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과 한신현 등의 배신으로 피로리(避老理)에서 관군에 체포되었다. 1895년 1월 13일 한성부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4월 24일교수형에 처해졌는데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향년 41세였다.

죽음을 앞 두고 지은 운명시의 한 구절인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일 뿐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리오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애민정신을 강조했고 ‘위국단심수유지’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아주리로 위국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훗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35년간(1910~1945) 식민지배를 받게된다. 민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도 당시에 일본에 기대고 빌붙어 생존함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애민과 위국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 매국노들이 취한 것은 애민과 위국이 아닌 개인의 입신과 부귀영화였을 뿐이다.

역사는 반복 되어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주장과 행위가 애민과 위국이라말하는 시대에 살고있다. 누가 진정으로 전봉준장군의 애민정신을 본 받아서 실현하고 위국으로 실천 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냉철하게 판단해야 되지 않을까? 손화중의 일생 고종실록 33권의 고종 32년 3월 29일 경자 기사를 보면 법무대신 서광범이 아뢰기를, “비류인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 등을 신의 아문에서 잡아 가두고 신문한 결과 진상을 자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전회통 추단조 군복기마작변관문률의 법조문에 적용시켜 교형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고 한다. 고종의 재가를 얻자마자 다음날 30일 새벽 모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시신은 수습되지 않아 실패한 혁명가의 뒷모습을 보였다. 사형 판결의 근거는 동학농민운동 1차 봉기 때의 활동을 자복하였다는 것인데 손화중이 동학당이라 칭하는 비도의 두목으로 고부관아로 들어와 군기를 탈취하고 전라 감영군을 공격했다는 것 등의 내용이다.

손화중(1861~1895)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이고 이름은 정식이며 화중은 자, 초산은 호이다. 한미한 양반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집안은 비교적 넉넉하였으므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한다. 기골 또한 장대하여 훗날 키가 9척이었으며 온건한 성격에 인품이 훌륭하였다. 12세 때 고흥 유씨와 결혼하여 4명의 자식을 두었다. 21세 되던 해 처남인 유용수와 함께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하여 수도 한지 2년 만에 귀향하여 포교를 시작하였다. 교주 최시형의 신임이 큰 데다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그 나라가 망할 것이오. 망한 후에 다시 흥한다’는 믿음이 전하던 선운사 마애불에서 비기를 꺼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민란이 일어나자 전봉준의 요청에도 거사에 불참하였는데 교주 최시형의 비폭력주의와 전략의 부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을 탄압하자 4개월만인 1894년 3월 김덕명, 김개남, 전봉준과 힘을 합쳐 1차 봉기를 일으켰다. 8천여 농민군 중 거의 절반이 대접주 손화중의 세력이었는데 후일 농민군 진압의 선봉장이었던 이규태가 그의 묘비명에 손화중이 전봉준, 김개남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진 거괴였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동학군이 1달여만에 전주성을 함락시켰으나 농민군의 희생이 큰 데다 청군의 참전이 예상되자 폐정개혁안을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맺고 5월 초에 철병하였다.

청군이 진주하자 천진조약을 앞세운 일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마침내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건 동학군이 10월 2차 봉기를 일으켜 전라, 충청 일대의 농민군이 총동원되었다. 전봉준은 손병희와 북상하였고 김개남은 전주에서 후위를 맡았으며 손화중은 최경선과 함께 나주, 광주 일대에서 일본군의 남해안 상륙을 대비하였다. 하지만 전봉준이 우금치전투에서 궤멸되었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하자 12월 해산하고 각자 은신하였지만 1달여만에 모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손화중은 생포된 아들을 대신 처형하겠다고 하자 숨어있던 흥덕의 수강산 산당 이씨 재실에서 재실지기 이봉우에게 고발토록 함으로서 군수가 되게 하여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김개남 장군의 리더쉽 김개남 장군은 동학사상에 입각한 태평천국의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특히 백정, 노비 등 천민들에게 신분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제시하였다. 그가 짧은 시간 많은 동학의 도인들을 포교하고 수많의 농민군을 모을 수 있는 탁월한 리더쉽은 명확한 비전 제시였다.

그는 도강 김씨(道康金氏)로 나름 재력과 존경받는 양반이었다. 그를 따르는 농민군 중에 는 백정, 노비 등 천민 집단이 많았다. 고루한 신분질서의 봉건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하층민들에게 평등사회를 약속하며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그의 애민정신이 그들을 목숨 걸고 따르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의 추진력은 놀라웠다. 무장봉기에 1,3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고, 2차 봉기도 전봉준과 손화중이 때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 남원에서 먼저 깃발을 올렸고, 짧은 기간 7만 명의 대규모 농민군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남접의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의 주력이 공주로 진격할 때, 개남의 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민보군이 강성했던 금산을 점령하고 진잠을 친 후 청주의 병영을 공격했다.

그는 결단력과 인재등용 능력도 탁월했다. 전주성 점령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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