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2)동학의 계승

김현종 · 2026-05-24 · 자유

치화(治化)로 평화로운 새 물결을!

내 생명 내 나라가 소중하다면 인류 공존의 평화 문화가 어디에선가 시작되어야 하기에 우리가 함께 나서야 한다. 지구 절대 방위를 알면서도 북반구에서는 남향으로 집 짓고 남반구에서는 북향으로 지어 태양 향해 지구 의존하며 산다.

태양이 지구를 경작하여 내주는 식품으로 생명력 보존하고 사람마다 경계로 상대 방위 소유 경쟁으로 지구를 혹사한다. 고대 인류는 평면 위에서 살았고 지구가 둥글다거나 자전을 한다는 선각자와 과학자들은 극형으로 처형되기도 했었다.

천문학의 발달로 지구에는 남극과 북극을 설정하고 동서로 돌고 도는 자전축을 나누어 시간 헤아리며 역사 경영한다. 인류는 사상적 절대자나 정치적 권력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생활의 절대 3요소 의식주(衣食住) 쟁탈을 위해 투쟁했다.

스타워즈 같은 병란에 세계가 공동 대응했음에도 치료 약을 공유하지 못한 인간은 동물적 욕구 문화를 지탱하고 있다. 세상이 가짜뉴스·가상화폐들로 종잡을 수 없는 허상되어 흔들려 있고 웬만한 면허증으로는 끼어 살기조차 힘들다.

맥도 모르고 심통 흔드는 사이비도 있고 우물 안 개구리로 뜀박질하는 자칭 도사 많아 가늠대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천재지변·지재지변 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인재지변 시대 언제쯤 생명존중에 의한 사람 중심 문화로 전환될 것인가?

동학의 치화로 평화로운 평등세상 만드는 일을 재정립하여 올바른 가치에 의해 부끄럽지 않은 홍익사상 공유해 보자.

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와 김개남의 만남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선생(1827-1898)은 동학의 2대 교주로 1864년 4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된 교조 최제우를 이어 전국을 누비며 동학교단을 정비하고 교세를 확장하여 동학 농민운동의 토대를 만든 역사적 인물이다.

해월은 1827년 3월 21일 경상도 경주부 경주읍내 황오방(현 경북 경주시 황오동)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 때 아버지까지 여의어 계모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19세에 손병희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한때 조지서(造紙所)에서 종이를 만드는 노동으로 생계를 잇기도 하였다. 34세인 1861년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할 당시 해월은 머슴으로 생계를 잇는 처지였는데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후계자가 되었다.

해월은 1863년 8월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이후 산속에 은거하면서 포교에 집중하였다.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강원도 울진현 등의 고을을 돌며 포교하다가 소백산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고 개접제, 육임제 등을 시행하며 포교와 교육과 조직을 다졌다. 1892년 교조의 신원과 포교 활동의 자유 등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자 다음해 동학 대표 40여명을 통해 광화문 상소를 올려 직접 고종에서 청원하였다. 이마저도 시행되지 않자 충북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평화적인 집회가 아무런 성과가 없어질 때쯤 전라도 고부에서 혁명의 불꽃이 일어났다.

김개남 장군 한편, 동학 농민군의 3대 지도자는 전봉준, 손화중 그리고 김개남을 뽑는다. 김개남(金開南)은 대접주, 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으로 불리었다. 1853년 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도강(道康)이고 이름은 기범(箕範)이다. 12세 때 두 살 아래인 전봉준 가족이 지금실로 이사를 왔다. 그의 부친 전창혁이 마을 훈장을 하여 개남이 함께 수학하며 전봉준과 의형제로 친하게 지냈다. 1884년 내지 1886년 쯤 동학에 입도한 후 동학의 교리에 따라 ‘태평천국으로 밝은 이상적인 나라를 남쪽으로부터 연다.’는 뜻으로 호를 개남(開南)으로 정했다. 1891년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포교를 위해 전라도를 순회하던 중 태인 지금실의 개남 집에서 약 15일간 묶었던 적이 있었다. 이 당시 개남은 여름옷 5벌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1892년 12월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을 벌일 때 수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 1893년 3월 보은집회에 많은 신도들을 동원하여 최시형으로부터 태인포(泰仁包)라는 포명을 받고 손병희, 김덕명, 손화중 등과 함께 대접주로 임명 받았다. 개남이 최시형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던 것은 개남의 탁월한 조직능력도 한 몫 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도강 김(道康 金)씨 접주가 24명이나 되었고 동학혁명 당시에도 가장 많은 동학농민군을 거느리린 것도 개남이었다. 특히 그의 부대는 천민 출신이 많아 매우 용맹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강한 부대였다.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은 군사적으로 방어가 용이한 금구 원평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우도를 호령하였고, 개남은 남원 교룡산성에 농민군을 주둔시키고 대도소를 설치하여 무주, 진안, 용담, 장수, 순천, 낙안, 고흥 등 전라좌도를 치리하였다. 또한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여 젊고 용맹한 김인배로 하여금 영남의 서남부까지 관장하게 하였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 계획에 처음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전봉준, 손병희 등이 계속해서 간청하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2차 봉기에는 지지를 표하며 적극 동참하였다. 충남 논산에서 남접과 북접이 합세하여 관군 및 일본군과 공주 우금치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패배하자 몸을 숨겼다. 1898년 강원도 원주에 머물던 중 밀고로 호매곡면 송곡리(현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에서 체포되었고 한성부에 압송된 뒤 반역죄로 1898년 6월 2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제2차 봉기는 개남에 의해 시작되었다. 1894년 8월 25일 남원에서 농민군 7만명을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봉기를 결의하자 깜짝 놀란 전봉준과 손화중이 달려와 만류하였다. 그러나 개남은 “이 큰 무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합하기가 어렵다.”면서 전면 기포을 계속 추진할 뜻을 내비쳤다. 결국 개남의 의지대로 9월 봉기는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세 부대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주력군인 전봉준의 부대는 북접과 연합하여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개남의 농민군은 병영이 있던 청주로, 손화중과 최경선의 농민군은 혹시 모를 일본군의 후방 기습을 차단하기 위해 광주와 나주로 진격하였다. 개남은 11월 10일 청주병영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한 후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임병찬의 고발로 12월 1일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서울로 압송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느껴 12월 3일 임의로 처형하고 그 머리만 서울로 이송하였다. 향년 42세, 부패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남쪽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김개남은 혁명가였다.

조선 독립의 물줄기를 솟구치게 한 인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945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등 요인들이 귀국 후 치른 국내 첫 공식 일정은 의암 손병희 묘 참배였다. 그들은 의암을 ‘조국 독립의 물줄기를 솟구치게 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한민족 내부 민족 독립의 역량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확고한 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을 맞을 때까지 독립에 대한 열망이 지속될 수 있었던 근원이 바로 3·1독립운동이었고, 그 중심에 의암 손병희가 있었다.

손병희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서 향리 손의조(孫懿祖)와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2년 조카 손천민(孫天民)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때 북접의 지도자가 되어 전봉준과 함께 무력 항쟁을 이끌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 손병희는 피신을 다니며 교세 확장에 힘썼다. 37세의 나이에 제3대 교주로 도통을 계승하고 5년간의 일본 피신 생활을 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진보회를 조직하여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히는 등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동학 교명을 천도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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