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독립운동 속으로 시리즈

2회차_서대문형무소_조현희

조현희 · 2026-08-22 · 신지식 청년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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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 나의 친구

동국대 조현희

자라나는 새싹의 꿈과 희망은 텁텁하게 밀려 나오는 문틈 사이로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언제나 가장 좁은 틈을 골라 찾아오기에, 나는 그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붉은 벽돌 담장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백 년 남짓한 시간. 그 시간 속에 몇 생애를 합친 것보다 많은 눈물이 스며 있었다.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고, 오래 묵은 침묵이 나를 감쌌다. 시간이 이곳에서만은 다른 속도로 흐르는 듯했다.

수많은 사진으로 둘러싸인 전시실을 걸었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다른 얼굴들이 유리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앳된 얼굴도 있었고, 이미 삶의 굴곡을 다 겪어낸 듯한 얼굴도 있었다.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대어 보았다. 차가운 벽지 너머의 온기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은 자꾸만 그곳으로 향했다. 그 순간 사진 속 그들은 더 이상 낯선 타인이 아니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는 그렇게 그들을 부르기로 했다.

지하로 내려서자 고문실의 서늘한 공기가 먼저 다가왔다. 벽에 걸린 도구들과 낯선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설명을 따라갈수록 상상조차 버거운 고통이 선명해졌다. 눈을 감아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 위에 나라가 있는가.' 그 물음 하나가 명치끝에 걸려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하루의 임무였을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의 전부를 걸고 견뎌야 하는 지옥이었다. 무엇이 인간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드는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내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았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동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침묵은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마지막 무기이자,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지상으로 올라와 실제 수감되었던 방들 앞에 섰다. 좁은 복도를 따라 늘어선 방들은 하나같이 작고 낮았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법한 공간에서 그들은 몇 번의 겨울을 견뎠을까. 그중 한 방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신비로운 빛깔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창밖에 걸린 태극기가 빛을 가려 만들어낸 색이었다. 우연이 만들어낸 그 빛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었다. 태극기가 드리운 그림자마저 이토록 마음을 저리게 만들 수 있다니. 조그마한 창, 그보다 더 조그마한 방. 그 좁은 공간에 다 담기지 못한 마음들이 벽 틈으로 새어 나와 지금도 이 복도를 떠도는 것만 같았다. 몇 개의 별을 헤아리며 밤을 버텼을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그들은 끝내 무릎 꿇지 않았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유관순 열사의 방 앞에 이르렀을 때, 옥중에서도 어린 막내동생을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도 결국 누군가의 언니였고, 누군가의 딸이었다. 무엇보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한 사람이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에도 그 마음이 향한 곳은 거창한 대의만은 아니었다. 자신보다 작고 어린 동생의 안위였다. 영웅이기 이전에 한 명의 평범한 소녀였을 그를 생각하니, 끝내 눈시울을 붙잡아둘 수 없었다. 위대함은 어쩌면 가장 거대한 것을 외치는 마음이 아니라, 가장 작고 소중한 것을 끝까지 놓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전시실을 나와 다시 마당에 섰다. 하늘은 그날과 다름없이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에서 그토록 처절한 시간들이 흘러갔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하늘은 그때도 푸르렀을 것이다. 사람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제 색을 지키며. 그 무심함이 오히려 마음을 시리게 했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서며 나는 다시 사진 속 얼굴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았던 이들은 낯선 타인이 아닌 나의 가족이었고 나의 친구였다. 그리고 오늘, 그들이 지켜낸 빛 속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들에게는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가족이자 친구였을 것이다. 백 년 전 좁은 방에 갇혀 있던 그들의 마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어졌듯 내가 기억하는 이 마음 또한 누군가에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처음 문을 들어설 때 보았던 가느다란 빛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 빛은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우리의 시간 속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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